"미국의 '공해 보호자' 역할에 대한 신뢰 약화"
페트로달러 체제도 도전 직면
전세계 에너지 '리셋' 전망도
(서울=연합뉴스) 문관현 기자 = "뒤늦게라도 용기를 내 해협으로 가서 직접 (석유를) 차지하고 스스로를 위해 보호하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달 1일(현지시간) 대국민 연설에서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중동산 원유·가스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국가들을 향해 한 말이다.
이에 대해 블룸버그는 세계 해상 무역로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해온 "수십 년에 걸친 미국의 정책과 결별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5일 보도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과 이란의 이번 전쟁이 '공해의 보호자(protector)'로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다는 것이 유럽과 아시아 당국자들의 평가다. 또 에너지 가격에 대한 우려는 물론 전쟁의 결과를 관리할 미국 정부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블룸버그는 징벌적 관세 부과, 무역 협정 파기 등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 무역을 뒤흔들기 위해 한 모든 일 중에서도 페르시아만의 안보에서 손을 떼고 다른 국가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는 것만큼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해군력을 바탕으로 석유와 원자재, 상품 등 전 세계 해상 운송의 안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게 블룸버그의 평가다.
바레인에 주둔 중인 미 해군 5함대 사령관을 지낸 존 W. 밀러 예비역 중장은 "호르무즈 해협에서 항행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면 모든 곳의 항행의 자유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말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35조달러(약 5경2천700조원) 규모의 세계 상품 교역의 80%가 해상 무역로를 통해 이뤄지는 것으로 추산된다.
미 국방부 대변인은 항행의 자유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묻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호르무즈 해협과 관련해 군이 "대통령에게 선택지를 계속 제시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백악관도 관련 논평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미국의 명확한 대응 전략이 부재한 가운데 각국은 다자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풀기 위해 무력 사용을 포함한 조치를 승인할 것을 유엔에 촉구했으며, 영국은 40여개국과 비군사적 해법을 논의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이 숨을 쉴 수 없게 된다"면서 "항행의 자유는 반드시 유지돼야 한다"고 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하며 세계 무역 체계를 흔들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과 같은 병목 지점(choke points)에서 선박의 자유로운 통행은 해양법에 관한 유엔 협약에 명시된 원칙에 따라 보호받고 있다. 하지만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행을 막으려 하거나 통행료를 부과하려는 것은 이러한 국제 체제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블룸버그는 짚었다.
앞서 블룸버그는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의 경우 배럴당 1달러 수준의 통행료를 위안화 또는 스테이블코인으로 받는다는 계획을 마련했다고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이달 1일 보도했다.
초대형원유운반선(VLCC)의 적재 용량이 보통 200만 배럴인 만큼 통행료로 200만달러(약 30억원)를 징수하겠다는 셈이다.
통행료를 중국 위안화로 받을 계획이라는 이란의 구상을 두고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해온 '페트로달러' 체제에 대한 도전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페트로달러 체제는 미국이 중동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안보를 보장해주는 대가로 사우디가 석유를 미국 달러화로만 거래하도록 한 것이 골자다.
1970년대 페트로달러 체제가 구축되면서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도 다시 공고해졌다. 페트로달러 체제에 균열이 갈 경우 달러 패권도 흔들릴 수 있다. 중국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달러 패권에 도전해왔다.
국제 석유 거래는 대부분 달러화로 이뤄지지만, 서방의 제재 대상인 러시아산 원유의 경우 러시아 루블화나 위안화로 거래되고 있다.
이번 전쟁이 전 세계 에너지 산업의 '리셋'(reset)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헬렌 톰슨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블룸버그의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이번 전쟁이 에너지 분야의 광범위한 지정학적 리셋을 가속화할 수 있다고 했다. 전투가 완화되더라도 수송로에 대한 신뢰 등 수십년간 세계 시장을 지탱해온 전제들이 크게 흔들렸다는 것이 톰슨 교수의 진단이다.
khm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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