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1998년 봄 제주, 바람에 날리는 꽃잎에도 호흡이 가빠지는 정순(염혜란)을 따라 펼쳐진다. 오랜 시간 기억의 파편에 의지해 삶을 지탱해 온 정순은 정신과 의사 희라(김규리)를 통해 봉인됐던 유년기를 떠올리고, 가슴 깊이 묻어둔 ‘그날’을 마주한다.
정순이 홀로 억척스레 길러낸 늦둥이 아들 영옥(신우빈)도 그해 봄 지독한 성장통을 겪는다. 영옥은 서울에서 전학온 경태(박지빈) 덕에 난생처음 반장 완장을 차지만, 곧 자신이 꼭두각시였음을 깨닫는다. 그 사이 교실은 점차 폭력의 위계에 잠식되고, 영옥은 잔혹한 방관자로 남겨진다.
영화 ‘내 이름은’은 한국 현대사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온 정지영 감독의 신작이다. 그간 석궁 테러(‘부러진 화살’), 김근태 전 장관 고문 사건(‘남영동 1985’), 론스타 사태(‘블랙머니’) 등 실제 사건들을 스크린으로 소환했던 정 감독은 ‘내 이름은’을 통해 제주 4·3 민간인 학살 사건을 호출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서사 구성 방식이다. 영화는 1948년과 1998년, 그리고 현재의 시점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며, 역사적 비극에 닿아 있는 정순의 과거와 병리 현상이 투영된 영옥의 현재를 교차 전개한다. 두 줄기는 정교하게 맞물리며, 개인의 외상적 기억과 집단의 역사적 기억을 중첩시킨다.
이를 통해 던져진 화두의 종착지는 ‘연대’라는 보편적 가치다. 정 감독은 극 말미 영옥이 폭력의 굴레를 끊어내고 친구와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과 마침내 선글라스를 벗고 세상을 직시하는 정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이 일련의 과정으로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건 개인의 저항이 아니라, 고통을 공유하고 함께 이겨내는 연대에 있다고 말한다.
관객에게 역사의 무게를 강요하거나 교조적으로 읍소하지 않는다는 점은 ‘내 이름은’의 강점이다. 영화는 촘촘하게 설계된 서사의 흐름을 따라 관객 스스로 그 비극에 연착륙하도록 유도한다. 그 중심에는 배우 염혜란의 열연이 자리한다. 염혜란은 시대의 증언자이자 서사의 가이드로, 우리 사회의 아픔을 다독인다.
오는 1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Copyright ⓒ 일간스포츠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