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십여년 간 불법사금융은 죽지 않았다. 다만 늘 새 얼굴을 골라 살아남았을 뿐이다. 전단지와 명함 탈을 쓴 불법사금융은 문자와 인터넷 광고를 거쳐, 이제 메신저와 익명 계정의 얼굴로 숨어들었다. 시장은 바뀌었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제도권 금융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절박함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가장 비싼 값으로 거래한다는 점이다.
지금 정부는 불법사금융과의 전면전에 나서고 있다. 범정부 TF를 꾸리고, 수사·금융·통신 당국과 지자체까지 묶어 계좌 차단, 원스톱 피해구제, 채무자대리인 지원, 예방대출 확대를 동시에 밀어붙이고 있다. 말 그대로 선언의 단계를 넘어 제도가 실제 현장에 닿을 수 있느냐를 가르는 과도기의 초입에 서 있다.
본보는 <불사금의 뿌리> 기획을 통해 한국 불법사금융의 뿌리와 변신, 피해자들이 그 문 앞까지 밀려나는 구조, 그 주변에 붙어 자란 또 다른 시장, 그리고 국가의 대응이 어디까지 닿고 있는지를 차례로 추적한다. 아울러 불법사금융은 왜 시들지 않았는지, 이번 전면전이 과연 시장의 뿌리까지 흔들 수 있을지 묻는다. 불사금의>
【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여러분, 부~자 되세요”
2000년대 초반, 이 광고 문구는 당대의 욕망을 관통했다. 외환위기의 충격에서 막 벗어난 사회는 회복을 넘어 더 빨리 소비하고 더 쉽게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얇고 번뜩이는 플라스틱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이었으나, 다른 누군가에게는 빚의 늪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당시 대학가는 그야말로 ‘카드 모집의 해방구’였다. 대학 정문과 번화가에는 카드사 부스가 즐비했고, 상환 능력이나 직업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화려한 사은품과 “누구나 만들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만으로 신청서는 빼곡히 채워졌다.
한때 카드빚으로 삶의 궤도를 이탈했던 50대 여성 이모 씨는 1990년대 말 대학가를 “화려함과 불안이 뒤섞인 기묘한 시절”로 회상한다. 신분증 하나면 며칠 뒤 우편함에 카드가 꽂혔다. 처음엔 식비나 책값이었다. 그러나 이내 술값과 옷값이 뒤를 이었고, 지갑이 비면 현금서비스를 받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플라스틱 머니’는 지불의 고통을 무디게 했고, 빚의 책임은 미래의 자신에게 떠넘겨졌다.
그러나 연체가 시작되자 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됐다. 카드사는 냉정하게 돌아섰고, 은행 문턱은 한없이 높아졌다. 훗날 이씨의 수중에 남은 것은 수천만원대 카드 명세서와 2003년 4월 자 종신보험 증권 한 장이었다. 이는 자신이 사라진 뒤에라도 가족에게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절박함이 빚은 사실상의 ‘유서’였다.
이씨는 “오죽하면 20대 나이에 억대의 사망 보험금을 알아봤다.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은 수익자 칸에 쓴 엄마 이름으로 갈음했다”고 토로했다.
빚이 집으로 따라 들어왔다...‘신용불량’의 시대
외환위기 직후, 정부는 내수 회복과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 신용카드 활성화를 해법으로 선택했다. 카드 사용액 소득공제, 영수증 복권제, 가맹점 확대 등 파격적인 유인책이 쏟아졌다. 카드를 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고, 카드 사용이 애국이자 현명한 소비로 포장되던 시기였다.
숫자는 그 팽창 속도를 공포스럽게 증명했다. 1998년 63조 6000억 원이던 이용액은 4년 만에 622조9000억 원으로 10배 폭증했다. 경제활동인구 1인당 평균 5장의 카드를 쥐게 된 시대, 카드는 결제 수단을 넘어 가장 손쉬운 대출 창구가 됐다.
문제는 관리의 부재였다. 시장점유율 전쟁에 매몰된 카드사들에게 신용 평가는 후순위로 밀렸다. 길거리 모집이 일상이 되며, 신용은 자격이 아닌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거품은 순식간에 터졌다. 2001년 말 2.6%였던 연체율은 2003년 14.1%까지 치솟았다. 2003년 기준 전체 신용불량자 372만명 중 카드 연체자가 60%(239만명)에 달했다.
국제기구들도 이 위기를 ‘플라스틱 버블(Plastic Bubble)’이라 부르며 한국의 구조적 실패를 지적했다. 국제결제은행(BIS)과 국제통화기금(IMF)은 카드사 간 과당 경쟁, 느슨한 신용평가, 미흡한 정보 공유를 원인으로 꼽았다. 실물 자산이 아닌 신용 자체가 거품이 돼 터져버린 사건이었다.
당시 분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사태 전후의 시장 구조 변화다. 카드 사태 당시 카드대출(현금서비스 및 카드론) 이용액은 무려 276.6조원에 달했고, 실질 연체율은 28.3%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시장 재편 이후 카드대출 이용액은 105.3조원 수준으로 급감했고, 연체율 역시 1.8%대로 안정화됐다.
이처럼 전체 카드 이용 총량은 큰 차이가 없었음에도 지표가 개선된 것은, 카드가 결제 수단을 넘어 ‘대출 기계’처럼 작동하던 기형적 구조가 바로잡혔음을 의미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과 교수는 “카드대란의 본질은 개인의 도덕적 해이가 아닌, 경기 부양을 위해 과잉 공급된 신용 리스크를 개인에게 전가한 구조적 설계 오류”라며 “신용이 풀릴 때는 모두가 우량 고객이었지만, 부실이 터지는 순간 가장 취약한 계층부터 금융 제도권 밖으로 무참히 밀려났다”고 분석했다.
실제 추락의 속도는 참혹했다. 카드는 쉽게 발급됐으나, 연체자에게 회복의 문은 철저히 닫혔다. 카드사의 한도 차단과 은행의 신용불량 등록은 단순한 금융 거래 중단을 넘어선 ‘사회적 사형선고’였다.
제도권에서의 탈락은 하룻밤 사이 벌어지는 일이었고, 빚을 견디지 못한 일가족의 비극과 경제 범죄 급증은 매일같이 뉴스를 장식했다. 카드대란이 남긴 상처는 기업의 재무제표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훨씬 깊고 선명한 문신으로 남았다.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보통 사람들...비극의 시작
카드 대란이 남긴 가장 뼈아픈 지점은 바로 이들이 밀려난 곳이 '제도권 밖'이었다는 사실이다. 본지가 확보한 당시 금융감독원의 ‘사채 또는 대부업체 이용자 설문조사지’에서도 카드대란과 사금융의 연결고리가 드러난다.
자금 사용처 항목에는 ‘교육비’나 ‘병원비’와 나란히 ‘카드연체 정리’와 ‘다른 사금융 대출 정리’가 별도 항목으로 명시돼 있다. 이는 사금융 유입의 주된 원인이 단순한 생활고를 넘어, 기존의 빚(카드빚)을 막기 위해 더 무서운 빚(사채)을 내는 ‘악순환의 늪’이었음을 당국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이용 동기와 유입 경로를 함께 묻고 있다는 점이다. 실직, 병원비, 교육비 같은 생계형 이유와 과소비, 도박, 유흥비 같은 소비형 이유가 한 설문지 안에 같이 놓여 있다는 것은,
당시 당국도 사금융 유입자를 하나의 집단으로 단순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생계형, 실패형, 연체정리형이 뒤섞인 복합적 시장이라는 문제의식이 존재했다.
업체를 알게 된 경로로 생활정보지, 인터넷, 친구·지인, 휴대전화 광고, 전단지가 나열된 점도 의미심장하다. 사금융은 이미 음지의 비밀시장만이 아니었다. 광고와 네트워크를 타고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훗날 문자, 메신저, 텔레그램으로 이동하는 오늘날 시장의 원형이 이 시기에 이미 드러나 있었던 셈이다.
‘대부업법’ 탄생 뒤에는 ‘서민금융’이 있었다
정부가 내놓은 대표적 대응은 2002년 10월 시행된 대부업법이었다. 정식 명칭은 ‘대부업 등의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이다. 핵심은 대부업자를 등록시키고, 음지의 사채를 감독 체계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데 있었다.
당시 최고이자율은 연 66%로 지금 기준에서는 충격적이지만, 무등록 고리대를 방치하는 것보다는 우선 시장을 드러내고 최소한의 규율 아래 두는 편이 현실적이라는 판단이 작동했다.
지나치게 높은 금리를 사실상 제도화했다는 비판도 있었고, 반대로 수백 퍼센트대 음지의 고리를 처음으로 감독망 안에 넣은 출발점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카드대란과 신용불량자 급증이 없었다면, 이런 제도화 논의 역시 그만큼 빠르고 절실하게 힘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조성목 서민금융연구원 이사장은 당시를 돌아보며 “그때는 사금융을 단순히 단속의 대상으로만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시장을 없애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우선 등록시키고 감독하면서 금융이용자를 보호하는 장치를 만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카드대란 이후에는 제도권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갈 곳이 없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로 떠올랐다”며 “결국 정책의 중심도 사금융을 관리하는 데서, 금융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다시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쪽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그는 2000년대 초 금융감독원에서 비제도금융팀장을 맡아 유사수신과 사채 피해를 다루며, 사금융 문제를 단속의 영역을 넘어 제도 설계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핵심 실무자로 꼽힌다. 외환위기 직후 이자제한법 폐지로 수백 퍼센트대 고금리조차 제재하기 어려웠던 현실 속에서, 그는 사금융을 더 이상 개인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 사례 검토와 이자 제한, 과도한 추심 규제를 담은 대부업법 초안 논의에도 이런 인식이 바탕에 놓여 있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부터다. 대부업법은 단지 당시의 사채시장을 관리하기 위한 임시 처방에 그치지 않았다. 제도권에서 밀려난 사람을 어떻게 다시 금융 안으로 끌어들일 것인가라는, 이후 서민금융 정책의 문제의식을 낳은 출발점이기도 했다.
실제로 카드대란 이후 시장은 일정 부분 재편됐다. 길거리 카드 모집은 규제됐고, 카드대출 중심 구조도 신용판매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제도를 손봤다고 해서 카드대란이 남긴 상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은 제도권 신용이 무너질 때 사람이 얼마나 빠르게 금융 밖으로 밀려나는지를 한국 사회에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결국 카드대란이 남긴 것은 카드 부실만이 아니었다.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흘러 들어간 불법사금융의 그림자였다. 그런 점에서 대부업법 이후의 서민금융 정책은 단순한 보완책이 아니라, 카드대란이 남긴 대규모 금융 탈락을 수습하기 위한 국가의 응답이었다.
다음 편에서는 부실채권을 매입·소각하고 채무 상담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롤링주빌리(옛 주빌리은행)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도 불법사금융이 가장 절박한 이들을 어떻게 붙드는지 들여다본다.
불법사금융 피해에 노출된 경우 금융감독원(☎1332)에 신고하여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과다채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에 서민금융진흥원(☎1397) 또는 신용회복위원회(☎1600-5500)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연이율 60% 초과 대부계약은 원금과 이자 모두 무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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