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카세(お任せ). 일본어로 '맡기다, 위임하다' 라는 뜻으로 주로 음식점에서 요리사에게 메뉴를 일임하는 주문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 음식인 스시를 파는 곳에서 많이 보이던 '오마카세'식 운영은 이제 다른 종류의 음식을 파는 곳에도 많이 적용되고 있다.
음식을 넘어 정치에도 오마카세가 적용된다면 어떨까? '대의 민주주의'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의 기본 형태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어쩌면 현 시대를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은 특정 정치인들에게 정치를 '오마카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를 오마카세 하기만 하면 안 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음식은 맛이 없거나 마음에 안들어도 그것으로 끝이지만, 정치는 그 결과가 잘못될 경우 미치는 파급효과가 그 순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중앙학원대학 법학부의 이헌모 교수는 최근 펴낸 저서 <갈림길의 일본-다카이치의 일본, 어디로 가는가>에서 일본의 정치 상황을 '오마카세 정치'라고 규정하며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결코 자신이 플레이어가 되려고 하지 않고. 그저 관객석에 앉아 편히 구경을 하며 선수가 실패하면 비난하고 조롱을 하며 야유를 날린다. 뒷담화를 일삼고 비난을 하다 또 다른 스테이지로 옮겨 관객석에서 관전하며 그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이런 행태를 오마카세 민주주의 또는 '관객 민주주의'라고 한다.
나랏일은 나랏님이 하시는 것이고, 지역 안건은 지자체의 단체장이나 의원들이 알아서 해줄 것이고, 우리 커뮤니티의 문제는 자치회 회장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라 굳게 믿고, 서민은 자신의 일상에 충실하면 된다는 소위 오마카세 민주주의 현상이 팽배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는 지난 1월 중의원을 해산한 뒤 치른 2월 선거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뒀다. 심지어 투표율도 2024년 선거보다 소폭 상승했다. 오마카세 민주주의가 팽배하다는 일본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끌어 들인 다카이치는 어떻게 역사에 남을 '완승'을 할 수 있었을까?
이 교수는 다카이치 총리의 개인적 인기, 야당인 입헌민주당과 공명당이 총선에 맞추어 신당을 창당했지만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구시대의 '이념' 대 디지털 시대의 '아이콘' 정치 구도 속에서 선거가 치러졌다면서 다카이치가 디지털 시대의 '아이콘' 정치를 선점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선거의 큰 특징의 하나는 기존의 아날로그 선거 방식이 디지털 방식으로 바뀌었으며, 그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 다카이치였다는 점이다. 중도개혁연합이 구태의연하게 당의 강령 등을 PDF 문서로 발표하면서 정책 논쟁을 중시하고자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유권자에게는 '낡고 칙칙하다' '정부 발목만 잡는다'는 등의 네거티브한 이미지로 각인되는 역효과를 낳았다.
다카이치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X, 쇼츠 영상 등을 활발하게 활용하여 무슨 사안이든 명쾌하고 분명하게 얘기하는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 구축에 힘을 쏟았다. 그렇지 않아도 폐색감에 젖어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기대하고 있는 유권자에게 기존의 고리타분한 정치에서 탈피하지 못한 신당은 심판의 대상이었다."
이 교수는 다카이치의 승리를 두고 '오마카세 민주주의'가 팽배한 일본의 현실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했다. 정치에 참여는 하지만 주권자인 국민은 관객석에 앉아 상황을 관전하면서 여론의 흐름과 대세에 편승하는 행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선거의 승리를 위해서는 정책보다 여론의 형성, 확대 및 전파 등이 중요해지고, 최근과 같은 사회에서는 "커뮤니티, SNS, 유튜브 등을 활용한 이미지 정치가 점점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이 교수의 진단이다. "현실보다 가상의 세계에서 정치를 논하고 평가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설명이다.
실제 다카이치 총리가 중의원에서 보여준 것은 "일본 열도를 강하고 풍요롭게"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세웠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와 어딘지 모르게 많이 유사해 보이는 슬로건 뿐이었다.
이 교수는 "(다카이치 총리가) 이 슬로건을 내걸며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긍정적인 연설을 쏟아냈는데 그 구체적인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라며 "쉽게 말하면 뜬구름 잡는 것처럼 희망에 찬 말은 마구 쏟아내지만 그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기 일쑤다"라고 지적했다.
자민당이 단독으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카이치 총리의 이후 행보는 거침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교수는 "다카이치 정권의 장기 집권을 위한 토대가 구축되었다. 2028년 여름의 참의원 선거까지는 이제 선거도 없다. 거칠 것이 없다. 따라서 국정 운영에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그는 "다카이치의 색깔을 드러내는 정책을 거침없이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헌법 개정도 염두에 두고 참의원에서는 개헌에 호의적인 야당 세력과의 연대도 모색할 것"이라며 "대내적으로는 계속해서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 내셔널리즘을 자극하는 기존의 포퓰리즘 정치 노선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런데 일본 유권자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헌법 개정, 부부 별성 금지, 스파이 방지법, 방위력 증강, 무기 수출 규제완화, 국가 정보국 창설, 일본 국기 훼손죄 제정, 외국인 정책 엄격화" 같은 사회를 "이분하고 갈등을 촉진하는" 정책일지는 미지수다.
"실제로 (일본) 국민이 가장 바라는 것은 잃어버린 30년의 굴레에서 하루 빨리 탈출하는 것이다. 답답한 폐색감에서 탈출하기 위한 정책이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다카이치의 지지율도 변동할 여지가 크다.
국론을 이분 하는 우익 성향의 정책 추진보다도 우선은 먹고사니즘의 해결이 급선무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카이치가 주구장창 주장해 온 책임 있는 적극 재정'의 실체가 과연 일본 서민들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따라 향후 자민당과 다카이치 정권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중의원을 독식한 다카이치 총리에게 이제는 의회가 발목을 잡는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정책보다는 이미지로 지금의 정치 환경을 만든 다카이치 총리가 실질적인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그래서 '잃어버린 30년'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일본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으나 일본이 정치로만은 바뀌기 어렵다는 점 역시 다카이치 총리를 필두로 한 일본 집권 자민당에게는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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