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락] 국내 10대 그룹 총수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과거 해외 출장이 사업장 점검이나 계약 체결에 집중됐다면, 지금은 상대국 정부 최고위층을 직접 만나는 것 자체가 핵심 목적이 됐다.
반도체·배터리·방산·에너지 등 주력 산업을 막론하고 각국 정부가 산업 정책 전면에 나서면서, 기업 간 거래(B2B)가 대정부 협상(B2G)으로 판이 커진 결과다.
총수들은 개별 프로젝트 수주를 넘어 국가 단위 인프라 전체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고 있다.
다만 총수 개인의 네트워크에 과도하게 기대는 구조는 리스크이기도 하다. 대관 업무의 시스템화와 최고위급 외교력의 조화가 요구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뉴스락>뉴스락>은 10대 그룹 총수들의 글로벌 현지 경영 현주소와 과제를 살펴본다.
총수가 직접 뛴다...'민간 외교' 시대, 재계 글로벌 전략이 바뀐다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이 해외 수주의 전부였던 시대가 저물고, 총수가 직접 상대국 권력자와 마주 앉아야 비로소 사업 논의가 시작되는 구조로 글로벌 경영 환경이 재편되고 있다.
배경엔 미·중 패권 갈등이 촉발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잇따라 시행하며 반도체·배터리 등 핵심 산업의 자국 내 생산을 사실상 강제했다.
유럽연합(EU)도 핵심원자재법(CRMA)을 도입해 역내 공급망 보호 장벽을 높였고, 중국 역시 첨단 기술 분야 외국 기업에 대한 규제 강도를 끌어올렸다.
주요국 정부가 산업 정책 전면에 직접 나서면서 반도체 공장 인허가, 발전소 수주, 배터리 합작 투자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상대국 정부의 승인이 사업 성립의 전제 조건이 됐다.
과거 해외 출장의 주된 목적이 계약 체결이나 현지 공장 점검에 머물렀다면, 지금은 상대국 정치·외교 인사와의 최고위급 네트워크 구축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총수가 직접 현지 정부 고위 인사를 만나야 비로소 사업 논의가 시작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 소장은 <뉴스락> 과의 통화에서 "오너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글로벌 네트워크 강화"라며 "상대국에서 최종 결정권자인 수장을 직접 만나길 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총수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락>
이어 "오너의 해외 글로벌 네트워크도 일종의 탑다운 방식이 적용되는 셈"이라며 "시장 확대와 안정적 공급망 유지를 위해 오너가 직접 나서야 하는 역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10대 그룹 총수, 해외 현장 진두지휘...'글로벌 영토' 넓힌다
국내 10대 그룹 총수들이 잇따라 해외 현장을 직접 챙기며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전략 시장을 확보하고 공급망을 다변화하기 위한 최고위급 행보가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고위 관료들과 만나 반도체 공급망 안정을 직접 논의했다. 미·중 갈등과 공급망 재편 흐름 속에서 중국 내 사업 안정성을 최고위급에서 확인한 것이다.
이 회장은 유럽에서도 벤츠·BMW·아우디 등 주요 완성차 업체 경영진과 연쇄 회동을 가졌다. 최주선 삼성SDI 사장이 동행한 가운데, 전기차 배터리 공급 협력이 핵심 의제로 논의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미국 워싱턴DC에서 또럼 베트남 공산당 총서기장과 만나 에너지 및 산업 분야 협력을 논의했다.
SK이노베이션이 베트남 초대형 액화천연가스(LNG) 발전 사업을 수주한 직후 성사된 만남이다. 단순 발전소 건설에 그치지 않고 베트남 국가 전력 공급 체계 전반에 걸친 협력 방향을 현지 정부와 함께 논의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새해 초 중국·미국·인도를 10일 만에 순방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중국에서 수소·배터리 분야 협력을 타진하고, 미국 CES 2026 현장에서는 글로벌 빅테크 대표들과 AI 중심의 미래 모빌리티 생태계 구축 파트너십을 확인했다. 이어 인도 첸나이와 푸네 공장을 연이어 방문해 핵심 신흥국의 현지화 전략과 생산 거점 고도화 현황을 직접 챙겼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AI 시대 에너지 인프라와 신흥 시장을 두 축으로 삼아 미래 성장 전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의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스템 통합 자회사 '버테크'를 방문해 하드웨어·소프트웨어 통합 솔루션 역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중남미 핵심 거점인 브라질 마나우스 생산법인 등을 집중 점검하며 관세 장벽을 돌파할 전략적 거점 정립에 나섰다.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은 미국 뉴욕 '월드 스틸 다이내믹스(WSD) 포럼'에 참석해 AI 전환과 한미 철강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이어 싱가포르에서 동남아 지역 전략 회의를 주재하며 해외 철강 법인의 공급망 고도화를 집중 점검했다. 글로벌 현지화 전략을 속도감 있게 추진해 보호무역주의 기조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구상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해 첫 해외 출장지로 인도를 선택하며 글로벌 사업의 무게추 이동을 본격화했다.
기존 주력 시장이었던 중국과 동남아를 넘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인도를 새로운 핵심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신 회장은 인도 푸네에 위치한 롯데웰푸드 신공장 준공식에 참석하는 등 현지 주요 생산 시설과 사업 환경을 직접 살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다보스포럼 등 주요 국제 무대에서 탈탄소 비전을 제시한 데 이어 핵심 전략 국가를 직접 찾고 있다.
미국 필리조선소 인수를 발판으로 미 해군 태평양함대 사령관과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사업 확대를 논의했다. 폴란드에서는 안제이 두다 대통령과 만나 무기 체계 수출과 현지 생산·기술 협력을 아우르는 포괄적 방산 네트워크 확장을 직접 주도했다.
허태수 GS그룹 회장은 한미 정상회담 경제사절단 자격으로 워싱턴DC를 방문해 현지 투자와 에너지 인프라 협력망을 다졌다.
대규모 자본 투입과 엄격한 규제가 맞물리는 에너지 산업 특성에 따라 해외 주요 기관과의 직접 협상에 나섰다. 전통 에너지 정제를 넘어 친환경 미래 에너지 인프라 구축에 방점을 찍었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은 지난 달 HD현대베트남조선과 HD현대에코비나를 방문, 공장 설비 및 안전시설을 점검하고 직원들을 격려했다. 지난해 10월 회장 취임 이후 음성, 청주, 울산 등 국내와 필리핀에 이은 다섯 번째 현장 행보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미국에서 리플렉션AI 창업자 등 빅테크 거물들과 연쇄 회동을 가졌다.
현지 정·재계 인사들과 폭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전통 오프라인 유통에 AI와 첨단 기술을 결합하는 미래 융합 사업의 청사진을 구체화했다. 내수 중심의 한계를 벗어나 테크 기반 혁신 기업으로의 체질 개선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글로벌 수주전 이끄는 '탑다운 외교'...총수 개인기 의존 한계도
글로벌 수주전에서 대기업 총수의 '탑다운 외교'가 핵심 돌파구로 자리 잡은 가운데, 특정 개인의 네트워크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적 한계도 함께 지적되고 있다.
최근 재계의 해외 사업이 단순 B2B를 넘어 국가 단위 인프라를 수주하는 B2G(기업·정부 간 거래)로 전환하면서, 최고경영진의 직접 협상이 가장 효율적인 수주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자국 우선주의가 팽배한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 대규모 국책 사업을 따내려면 최고위급 인사 간의 밀도 높은 소통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총수 개인의 '관계 자산'에 전적으로 기대는 현재의 방식은 경영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경영진의 건강 문제나 사법 리스크 등으로 일시적 공백이 발생할 경우, 그동안 다져온 해외 영업망과 파트너십이 즉각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 소장은 "오너가 구속 수감 등 사법 리스크로 부재할 경우, 해외 글로벌 네트워크를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확대하는 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른다"고 짚었다.
오 소장은 "상대국에서는 격에 맞는 인물과 접촉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2인자나 3인자가 주도권을 갖고 해외 인맥을 다각적으로 확대하기는 쉽지 않다"며 "실무자 간 접촉은 상시로 이뤄지더라도, 수장급 회동에서는 전문경영인이 다소 급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글로벌 선진 기업들처럼 대관(GR·Government Relations) 업무를 철저히 시스템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주요국의 선거 결과나 신흥국의 정권 교체 등 외부 변수와 무관하게 일관된 협상력을 유지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기업 문화 특성상 대관 업무의 완전한 시스템화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존재한다.
오 소장은 "실무자 간 네트워크는 지속해서 유지하되, 중요한 결정은 결국 오너가 직접 챙기거나 담판을 지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전문경영인 급에서 해외 글로벌 대관 업무를 다각적으로 확장하기에는 한계가 존재하며, 민감한 사안일수록 오너 총수가 직접 나서야 해결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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