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이 올해로 78주기를 맞았다. 제주4·3의 진상규명을 위한 기관인 '제주4·3평화재단'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많은 인명피해와 후유증을 남긴 사건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제주4·3의 전개 과정과 사건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폴리뉴스> 는 '제주4·3평화재단'이 정부에서 발행한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의 내용을 기초로 기록한 책자를 일부 편집해 소개한다. [편집자주] 폴리뉴스>
광복 직후 제주도의 정세
광복 직후 자주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제주에서도 대정면 건준을 시작으로 1945년 9월 10일 제주농업학교에서 제주도 건준이 결성됐다. 중앙의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재편됨에 따라 제주도 건준 또한 9월 22일 행정조직을 표방한 인민위원회로 개편됐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우선 치안 활동에 주력했다. 치안 업무는 주로 일본군 패잔병의 횡포를 막는 일과 토지·산업체 등 적산(敵産)이나 군수물자를 멋대로 처리하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인민위원회는 각 면별로 국민학교·중학원 등을 설립하여 자치교육을 실시 했다. 인민위원회는 실질적으로 도내 각 면과 마을 행정을 주도했다. 미군정에 의해 행정이 실시되었지만 여러 마을에서 인민위원장이 이장이 됐다.
인민위원회의 자율적인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제주도에도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이 제주도에 진주한 것은 1945년 9월 28일, 실질적인 군정 업무를 담당할 제59군정중대가 도착한 것은 11월 9일이었다. 제59군정중대는 인력 부족과 정보 부재로 원만한 통치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이 결과 영향력이 강했던 인민위원회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공식적인 행정기관이나 통치기구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은 도청과 경찰의 요직에 일제 때의 관리를 그대로 앉혔으며, 서서히 우익인사들을 조직화시켜 인민위원회에 대항할 세력으로 키워나갔다.
1946년 8월 1일 제주도(島)의 도(道) 승격은 우익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결정적 계기였다. 우익들은 도 승격을 꾸준히 주장해왔다. 정부는 도 승격에 맞춰 경찰 병력을 늘리고, 조선경비대 9연대를 창설하는 등 공권력을 강화했다. 이에 맞춰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시작됐다.
3·1사건과 민·관 총파업
1947년 3월 1일은 해방 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절이었다. 제주도 좌익진영은 이 날 기념식을 전도민적 행사로 치르기로 계획했다. 이를 위해 앞서 2월 17일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교육계·유교계·학교단체 등을 모아 '3·1투쟁기념행사제주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어서 2월 23일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제주민전)이 결성돼 3·1절 기념행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2월 23일 충남·북 응원경찰 100명을 제주에 급히 파견해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3·1절 행사 때 시위는 절대 불허한다는 방침과 집회 사전 허가 원칙을 정했다.
3·1절 기념대회는 각 읍·면 별로 치러졌고 제주북국민학교에는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3만여 명이 모였다. 제주읍 북국민학교의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난 뒤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향한 뒤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다쳤다. 기마경찰이 이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관덕정 부근에 있던 무장경찰은 이에 대응, 총격을 가해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들 중에는 15세 국민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안고 피살된 여인도 있던 것으로 기록됐다. 이 발포 사건으로 제주도의 민심이 급격히 악화되며,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시작됐다. 도청 등 관공서는 물론 은행·회사·학교·운수업체·통신기관 등 도내 166개 기관 단체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과 경찰은 사태 수습보다는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주력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3월 19일 담화문을 발표해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이 사건은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공표했다.
미군정은 3월 15일부터 파업 주모 혐의로 민전 간부들을 연행하기 시작하며 4월 10일까지 500명을 검속했다. 이들 중 52명이 실형을 언도 받아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4·3으로 가는 길목
8월에 접어들자 미군정은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도지사 사임 후 제주민전 의장으로 추대된 박경훈을 비롯한 민전 간부 30여명을 구속했다. 많은 청년들이 검거를 피해 도외로 혹은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일부는 한라산의 동굴 등에 은신처를 마련해야 했다.
1948년 1월 남한 단독선거안이 명백해지자 남한 내의 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잇따라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격렬하게 반발했다.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됨을 막고자 했다. 이 반대 대열에는 좌파 진영만이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도 가세하고 있었다. 남한 단독선거 찬반 문제를 놓고 우파 진영도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나는 단독정부 반대·남북협상의 추진을 내걸고 통일운동을 주창한 김구·김규식 등의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미군정과 보조를 맞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의 노선이었다.
이런 정치 흐름 속에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1948년 2월 7일을 기해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고 간 '2·7사건'이었다.
1948년 초 제주도 내 좌익진영은 조직의 핵심 간부들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궤멸 상태에 빠졌다. '2·7사건'을 거치면서 전도적으로 검거 바람이 불었고, 붙잡힌 청년들에 대한 가혹한 취조가 이뤄졌다.
궁지에 몰린 제주도 좌익진영은 결사 항쟁을 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결국 여러 번에 걸친 비밀회의 끝에 경찰과 서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의했다.
1948년 4월 3일 봉기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4·3사건의 불꽃이 튀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이 사건으로 4월 3일 하루 동안에 ▲경찰=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미군정의 대응과 평화협상
미군정청은 4·3이 발생하자 4월 5일 아침 전라남도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제주에 급파하는 동시에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또 서청 단원들도 증원되었다.
미군정은 4월 17일, 그동안 관망 상태에 있었던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령했다. 또한 부산 5연대 1개 대대를 차출, 제주도 파병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과 같은 극우 세력의 횡포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여 '선선무 후토벌'을 원칙으로 정하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이 결과 1948년 4월 28일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 측 군사총책 김달삼 등이 만나,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4·28 평화협상은 미군정 하지사령관의 무력 진압 방침 결정으로 깨졌다. 하지 사령관은 4월 27일 미 24군단 작전참모부 슈(M. W. Schewe) 중령을 제주에 보내어 사태 진압을 위해 귀순 공작과 무력 진압의 두 가지 방법을 함께 고려했다.
그러나 제주에서 작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슈 중령의 4월 29일자 보고서에서 제주도 상황에 대해 "미 59군정중대장이 제주도에 있는 병력을 확실히 통솔한다면 현재의 주둔 병력만으로도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충분하다. 공산주의자들과 게릴라 세력이 오름들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활발한 작전이 요구된다"고 평가했다.
현재의 병력만으로도 진압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이 보고서는 하지사령관으로 하여금 무력 진압을 결정하게 하였고, 결국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은 미군정 수뇌부에 의해 무시되었다.
평화협상 직후인 5월 1일에는 오라리 마을 방화사건이 발생, 협상을 파기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이 방화는 우익 청년들이 저질렀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조작했다. 미군이 이 불타는 마을을 촬영,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란 영상 기록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5·10 선거 거부
무장대는 5·10단독선거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선거사무소를 집중 공격하고 선거관계 공무원을 납치·살해하는 한편, 선거인명부를 탈취했다. 5월 10일 선거 당일에 무장대는 중문·표선·조천 등지에서 투표소를 공격했다. 다수의 주민들은 무장대에 동조하여 입산, 선거를 거부했다.
결국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는 투표수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제주도 선거구는 3개 중 남제주군 선거구만 선거를 치러 무소속의 오용국이 당선되고, 북제주군의 2개 선거구는 투표율이 모자라 무효로 처리된 것이다.
미군정은 북제주군 2개 지역의 선거 무효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선거를 치를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아 결국 재선거는 무기 연기되었다.
5·10선거의 거부는 미군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제주도민들에 대한 대탄압이 예견되었다. 미군정은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임명,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조병옥 경무부장도 담화를 발표하여 '강경 진압 방침'을 선포했다. 전국에서 차출한 응원경찰 450명을 추가로 파견하는 한편 서청 단원을 계속 증파했다. 경비대가 주도하는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5월 27일까지 붙잡힌 입산자는 3,126명에 달했고, 6월 중순에는 무려 6,0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무리한 토벌이 이루어지자 서서히 경비대의 강경 방침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5월 20일 밤 9연대 병사 41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무기와 장비, 5,600발의 탄약을 소지하고 모슬포 주둔지를 빠져나가 대정지서를 공격하고 일부는 입산했다. 경비대에서는 병사들이 10여명 씩, 혹은 몇 명씩 부대에서 탈출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6월 18일에는 박진경 연대장이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배경용·신상우 등이 체포되고, 군법회의를 거쳐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가 처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년 5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총선거에는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 참가 세력과 많은 중도계 인사들이 참가를 거부함으로써,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그리고 일부 중도세력만 출마했다. 결과는 이승만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돼,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한편 1948년 7월 중순경부터 남한 전역에서 '지하선거'가 열렸다. 이는 북한의 정권 수립에 따른 것이었다. 4·3의 와중에 있던 제주도에서의 지하선거는 주로 백지에 이름을 쓰거나 손도장을 받아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무장대의 강요에 마지못해 가명으로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누르는 경우가 많았다. 뒤에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백지날인'한 게 죄가 되어 총살의 원인이 됐다.
초토화작전 실시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그런데 10월 19일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의 추천으로 제주에 온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1948년 10월 당시 9연대 군수참모를 지냈던 김정무는 중산간 마을에 불 지른 작전을 군 내부에서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렀다고 증언하였다.
"제주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군에 지시했다. 이 지시는 '초토화작전'이 미국과의 교감 속에 진행됐음을 암시하고 있다.
미·소 냉전이 심화되는 가운데 아시아에 공산주의로부터의 방벽을 구축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당시 송요찬 소령의 포고문을 살펴 보면 제주도에 대한 진입의지를 알 수 있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의 포고문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조선일보」, 1948. 10. 2.
집단 희생과 '죽음의 섬'
'초토화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살상이 행해졌다. 4·3사건 전 기간 동안의 희생자 수는 2만 5,000~3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초토화작전'이 시작되기 전인 1948년 9월말까지의 사망자 수는 대략 1,000명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중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疏開)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불태웠다. 소개령이 내려졌는데도 병자·노인·어린이 등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일부 중산간마을에 소개령이 전달돼 해변마을로 소개해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한 명만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했다(代殺). 이러한 소개작전은 주민들을 오히려 도피 입산하게 만들었다. 이는 수많은 주민 희생과 사태의 장기화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무장대의 보복 습격도 끊이지 않았다. 1948년 11월 이후 무차별 토벌작전이 벌어진 이후에는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토벌대 편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일부 마을을 지목해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위미리 등은 '토벌대 진영'이라 하여 무장대로부터 큰 피해를 당했다.
주로 군·경 주둔지인데다 이들 마을에서 '도피자 가족' 총살이 벌어지는데 대한 보복이었다. 무장대 세력이 궤멸 상태에 놓인 이후에는 굶주림에 처한 잔여 무장대들이 식량을 약탈하러 마을에 들어갔다가 보초 서던 주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1949년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00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그 중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부터 1949년 봄까지 겨우 몇 달 사이에 군·경 토벌대의 진압작전과 무장대의 보복 살상으로 수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130여 마을이 소개령 등으로 초토화됨으로써 제주공동체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가장 인명 피해가 많았던 1949년 1월 17일 '북촌사건'이다,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전사한데 대한 보복으로 북촌마을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350여 명을 집단 총살한 사건이다.
한라산 피난자의 복귀와 무장대 소멸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선무공작에 따라 많은 입산자들이 피신해 있던 은신처를 나와 삼삼오오 귀순하여 왔다. 귀순자들은 젊은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어린이·노인들도 제주읍내와 서귀포의 임시수용소에 가두어졌다. 선무작전이 4월까지 수행되면서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계속 속출 했다. 당시 작전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과 자진 귀순하거나 체포되어 포로가 된 자를 합쳐 거의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내려오면 살려 준다"는 선무작전에 따라 백기를 들고 하산한 주민들은 제주읍내 주정공장 등에 갇혀 있다가, 일부는 석방되었으나 상당수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군 당국은 원래의 회유 방침을 무시하고 강경한 처리로 일관했다. 형량도 죄명도 모른 채 형식적인 군법회의를 거쳐 1,650여 명의 귀순자들은 사형되거나 육지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6월 7일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사살됐다. 무장대 세력이 이미 와해된 상태이긴 하지만, 이덕구는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의 상징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주는 영향은 컸다. 이에 고무된 국방부는 제2연대의 활약으로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사실 이덕구는 경찰의 작전에 의해 사살된 것이다. 경찰은 이덕구의 사체를 나무 십자가에 묶어 하루 동안 제주경찰서 정문 앞에 전시했다가 화장 처리했다.
행방불명된 사람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또 다시 제주에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처형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주에서도 예비검속이 실시되었다. 경찰 공문에 따르면, 1950년 8월 17일 당시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자의 수는 1,120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7월 29일, 8월 4일, 8월 20일에 각각 서귀포, 제주항 앞 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되었다.
모슬포 양곡창고에 갇혀있던 250여 명의 검속자들은 8월 20일 밤중에 끌려나와 모슬포 섯알오름 기슭 탄약고 터에서 총살 암매장되었다. 그 뒤 1956년 3월 한림지서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들이 61구의 시신을 수습하여 한림읍 금악리 '만벵듸 공동장지'에 안장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대정지역 유가족들이 132구의 유골을 수습하여 안덕면 사계리에 부지를 마련해 묘역을 조성했다. 이 묘역은 1960년 유족들이 성금을 모아서 비를 세우고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고 이름을 붙였다.
제주경찰서에 수감돼 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이 산지항 앞 바다에서 수장되거나, 정뜨르비행장에 끌려가 총살 암매장되었다는 증언이 전해진다. 서귀포경찰서에도 솔동산 근처 창고에 수감되어 있던 약 250명의 검속자들이 두 차례에 걸쳐 계엄군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서 희생되었다.
6·25전쟁 직후 4·3과 관련된 살상은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이루어졌다. 사선을 뚫고 살아나 일반재판 및 군법회의를 거쳐 육지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수천 명의 제주출신 형무소 재소자들이 죽어갔다. 6·25전쟁 발발 당시 전국 형무소 재소자는 37,335명이었고, 이 중에 평택 이남의 형무소 재소자는 20,229명이었다.
제주에서 이송된 4·3 관련 재소자는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 명과, 두 차례 군법회의 대상자 중에 만기 출소한 사람을 제외한 2,350여 명이 6·25전쟁 직후에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 2,500여 명 대부분은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 되었다.
대전형무소에 있던 제주사람 300여 명은 7월 초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에서 집단 희생 되었다.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는 그때 시신이 아직도 수습되지 않고 땅 속에 묻혀있다.
대구형무소에 있던 제주출신 수형인 142명도 군·경에 인계되어 대구 달성군 가창골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이들 형무소 재소자 총살은 정부 최고위층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형수가 아닌 재소자들을 총살한 것은 또 하나의 불법 학살이었다.
1947년 3·1사건과 뒤이은 총파업으로 상당수 제주도민은 피검되거나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물 막은 섬에서 쫓기는 자의 도피처로 떠오른 곳이 일본이었다. 또 1948년 4·3 발발 이후에도 감시의 눈을 피해 조그만 밀항선으로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4·3 사건 발발 후 제주도 도령(道令)에 의해 전 지역과의 해상교통을 일체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했다.
그 결과 해상교통이 단절되고 해군에 의한 공중정찰과 해안마을의 경비, 야간 통행금지, 여행증명제, 계엄령 선포, 경찰·경비대·우익청년단의 증강 등이 이뤄졌던 상황을 고려하면 제주도에서 출항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증언을 통해 이 시기에도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간 사람들이 다수 확인된다.
일제강점기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제주인들은 광복 이후 부푼 꿈을 안고 귀향했으나 4·3사건으로 생활이 불안해지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오사카 등지를 중심으로 모여 한을 품은 채 살아왔다. 이들 중 일부는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이어진 '북송(北送)' 때 북한으로 가기도 했다. 이들은 고향 제주도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이념과 분단의 장벽 때문에 눈앞의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4·3으로 인한 운명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7월 8일 전국적으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제주도에서는 4·3의 마무리 토벌을 위해 주둔하던 해병대 신현준 사령관이 제주지구계엄사령관을 겸임했다.
정부는 7월 16일 제주주정공장에 육군 제5훈련소를 설치해 신병 양성에 나섰다. 8월 3일 중고생으로 조직된 학도돌격대가 결성되었고, 이들을 비롯한 제주도 청년들 3,000명이 해병 3·4기로 지원 입대하였다. 제주 출신 해병들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서울 탈환에 나섰고, 9월 27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렸다.
1951년 3월 21일 기존의 대구 제1훈련소, 부산 제3훈련소 및 제주의 제5훈련소를 통합하여 육군 제1훈련소를 대정읍 상모리에 설치했다. 이와 함께 미군 제5공군 군고문단이 주둔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주도위수지구사령부가 설치되어 제주지역의 경비, 육군의 질서 및 군기의 감시, 육군 소속 건축물 및 시설의 보호에 관한 임무를 수행했다. 위수사령부는 제주도 일원의 경비를 담당하고 군사시설을 보호할 책임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남아있던 재산 무장대 토벌작전에 부분적으로 참여했다.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에서 양성된 병력은 50만 명에 이른다. 제1훈련소에도 수많은 제주 청년들이 입대했다. 6·25전쟁 당시 육군과 해병대에 입대해 참전한 제주 청년들은 1만여 명에 달한다. 정부에서 '빨갱이섬'으로 낙인찍은 제주도가 거꾸로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는 방패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52년 제주도경찰국은 '100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 한라산 기슭 곳곳에서 무장대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다. 1953년 1월 대유격전 특수부대인 무지개부대(부대장 박창암 소령)가 한라산 작전지역에 보강 투입되었다. 이때 재산 무장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1957년 4월 2일 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이 구좌면 송당지역에서 생포되면서 4·3은 종식되었다.
1954년 9월 21일 제주도경찰국장 신상묵은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을 해제, 전면 개방을 선언했다. 지역주민들이 담당했던 마을성곽 보초 임무도 없어졌다. 소개되었던 중산간 마을에 대한 복구 및 이주·정착사업이 전개되었다.
한편, 지난 달 29일 이재명 대통령은 제주 4·3 희생자 추모 제단에 분향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이 대통령은 유가족을 만나 명예회복을 약속하며 "잔인한 국가 폭력에 희생된 제주 도민들을 생각하면 대통령으로서 매우 송구스럽다는 마음이 든다"며 "대한민국에서는 국가 폭력으로 국민들이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그런 일이 생기면 나치 전범 처벌과 같이 영구적으로 책임지도록 반드시 만들어 놓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3과 같은 국가폭력범죄의 공소시효와 민사 대상 소멸시효의 완전한 배제, 역사 왜곡 및 폄훼 적극 대응, 피해 보상신청 기간 연장 등을 약속했다.
[폴리뉴스 김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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