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기업 총수들의 현장 경영 행보가 부쩍 잦아졌다. 국내 공장은 물론 해외 현장을 찾는 일도 다반사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영향으로 과거 원가 절감을 위한 생산 기지에 불과했던 해외 현지 공장이 기업의 운명을 결정짓는 미래 전략의 거점으로 평가되고 있어서다. 특히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각국 기업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앞으로는 '경영'이라는 단어 앞에 '현장'을 붙이는 것조차 무색해질 정도로 당연한 현상이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현지 법인·공장은 옵션 아닌 필수…국제사회 자국우선주의 확산에 분주해진 총수들
LG그룹에 따르면 구광모 LG 회장은 지난 30일(현지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웨스트보로에 위치한 LG에너지솔루션의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스템 통합 전문 자회사 버테크(Vertech)를 방문했다. 이날 현장 설비와 제품 상태를 꼼꼼히 살핀 구 회장은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사업 기반 확보를 주문했다. ESS 배터리 공급을 넘어 고부가가치 통합 솔루션 역량을 강화해 시장 내 압도적 지위를 구축해야 한다는 당부도 더해졌다.
구 회장은 미국 일정을 마친 직후 브라질로 이동해 LG전자 마나우스 생산법인과 현지 유통 매장에서 중남미 시장 전략을 논의했다. LG전자는 오는 7월 가동을 목표로 브라질 남부 파라나주에 냉장고 신공장을 건설 중이다. 높은 수입 규제와 관세 장벽을 정면 돌파해 중남미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포석이다. 파라나주 신공장은 기존 마나우스 생산법인과 함께 LG전자의 중남미 영토 확장을 이끌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기선 HD현대그룹 회장도 해외 현장 경영 행보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정 회장은 지난달 24일부터 이틀간 베트남에 위치한 HD현대베트남조선과 HD현대에코비나를 방문해 생산 설비를 점검했다. HD현대에코비나는 친환경 독립형 탱크 제직 및 아시아 지역 내 항만 크레인 사업을 위해 HD현대그룹이 인수한 베트남 생산 법인이다. 지난해 12월 인수 후 처음 사업장을 찾은 정 회장은 탱크 제작 공장 건설 현장과 LNG 모듈 생산 라인을 직접 돌며 사업 전반을 점검했다.
최고경영자의 해외 현장 경영 강화 기조는 국내 기업만의 일은 아니다. 세계 각국의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들도 해외 경영 보폭을 넓혀나가고 있다. 지난 2024년 애플의 팀 쿡 CEO는 베트남을 깜짝 방문해 동남아시아 생산 거점 이전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중국에 집중된 아이폰 생산 라인을 분산시켜 외부 요인에 의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한편, 신흥 시장 주도권을 선점하겠다는 취지였다.
글로벌 항공 및 자동차 기업들도 해외 생산 거점 투자를 통한 공급망 재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브라질의 대표적인 우주항공 기업 엠브라에르의 프란시스코 고메스 네토 CEO는 지난해 3월 폴란드를 직접 방문해 현지 항공 산업 생태계 확장 계획을 알렸다. 엠브라에르는 자사 군용 수송기 C-390의 급증하는 유럽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폴란드 내 최종 조립 공장 설립을 추진중이다. 암브라에르는 지난해 폴란드 항공 정비 전문 기업인 로탐스(Lotams)를 유럽 최초의 자사 제트기 공식 서비스 센터로 지정하며 탄탄한 사후 관리망까지 확보한 상태다.
세계 각국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해외 현장을 찾는 배경에는 급변하는 글로벌 경영환경이 자리하고 있다. 글로벌 사회 전반에 걸쳐 자국우선주의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생산 거점 현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매김했다는 주장이다. 미국을 시작으로 자국 내 생산 제품에만 파격적인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나라들이 늘고 있다는 게 근거로 제시됐다.
재계 등에 따르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유럽의 핵심원자재법(CRMA)은 현지 생산 비중이 낮은 기업을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한다. 베트남은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자국 내 생산법인을 설립할 경우 최대 4년간의 법인세 면제와 9년간의 추가 감면, 토지 임대료 감면 등 전폭적인 지원책을 제공한다. 반도체와 배터리 등 미래 핵심 산업 분야에는 별도의 추가 보조금까지 지급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또한 자동차 산업 지원 프로그램(APDP)과 제조업 경쟁력 프로그램(MCEP)을 통해 현지 생산 기업에 상당한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부여한다. 이러한 혜택들의 전제 조건은 현지 인력 고용과 현지 부품 사용 비율 충족이다.
전문가들은 자국 우선주의 기조가 강해지는 상황에서 현지화 정책은 더 이상 옵션이 아닌 기업들의 필수 생존 전략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김계수 세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주요국들이 공급망 안정화를 명분으로 보호무역주의 성격의 정책을 강화하면서 현지 생산 시설 확보는 시장 진입을 위한 최소한의 통행세가 됐다"며 "현지에 직접 거점을 마련하게 되면 규제 장벽을 넘는 동시에 물류 최적화와 고객사 밀착 대응도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벌 총수나 최고경영자가 직접 현장을 찾는 것은 의사결정 속도를 높여 불확실한 대외 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하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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