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앞에 서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위로 끌려 올라간다. 층층이 쌓인 시간과 조형의 밀도가 한눈에 들어오기보다, 오히려 천천히 다가온다. 돌이라는 물성 안에 새겨진 정교한 세계, 그리고 그 위로 겹겹이 쌓인 역사까지. 이 탑은 한 시대의 건축물이 아니라, 고려라는 시간의 결을 압축해 세운 거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고려시대 석탑은 대체로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하며 안정된 비례와 절제된 장식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러한 흐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실험성을 드러낸다. 평면 구성에서부터 이례적인 변화를 시도하며 기존 질서에 균열을 가한다. 아자형 기단은 공간을 다층적으로 나누며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내고, 이는 위로 갈수록 수축되는 탑신과 긴장감을 형성한다.
특히 기단부와 탑신부의 연결 방식은 구조적 안정성과 장식적 화려함을 동시에 추구한다. 3단으로 구성된 기단은 단단한 आधार을 제공하면서도 각 면에 촘촘히 새겨진 조각으로 인해 시각적 무게감을 분산시킨다. 이 조각들은 장식 요소를 넘어 신앙적 세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불과 보살, 천부, 용 등 다양한 존재들이 얽혀 있는 구성은 불교적 세계관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탑신부에 들어서면 양식의 전환이 더욱 뚜렷해진다. 1층에서 3층까지는 기단과 유사한 평면을 유지하지만, 상층으로 갈수록 구조가 점차 축소되며 위로 솟아오르는 느낌을 강조한다. 4층부터는 사각 평면으로 변화하면서 시각적 안정감을 확보하는 동시에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형식의 변주를 넘어 건축적 생각의 확장을 보여준다.
각 층 옥신 아래 둘러진 난간은 공간을 나누면서도 장식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실제 기능을 위한 요소라기보다 상징적 경계를 나타내는 장치로 볼 수 있다. 옥개 아래에 표현된 두공 형식은 목조건축의 구조를 돌로 표현한 대표적 사례로, 당시 건축기술의 융합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지붕 표현 역시 주목할 만하다. 팔작지붕 형태와 기왓골의 세밀한 묘사는 돌이 가진 성질을 넘어 목조건축의 질감을 재현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는 건축 재료 간 경계를 넘나드는 조형 의식을 반영하며, 눈으로 보는 사실감과 상징성이 동시에 살아 있는 부분이다.
이 탑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조각의 밀도와 정교함이다. 기단과 탑신 전반에 걸쳐 빈틈없이 채워진 조각들은 화려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치밀하게 계산된 구성 속에서 균형을 이룬다. 각 인물상과 동물상은 각각의 이야기를 담으면서도 전체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제1층 옥신 이맛돌에 새겨진 조탑명은 이 작품의 연대를 명확히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다. ‘지정 8년’이라는 기록은 이 탑이 1348년, 충목왕 재위 시기에 건립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려 후기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불교 신앙과 건축 활동이 이어졌음을 알려준다.
이 시기는 원 간섭기라는 특수한 역사적 환경 속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 탑의 양식에는 중국 원대 건축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다포식 두공 표현이나 장식의 화려함은 이러한 문화 교류의 결과로 이해된다. 이는 고려가 외부와 활발히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보여준다.
탑의 이동사 또한 이 유산의 의미를 넓힌다. 원래 경기도 개풍군 경천사지에 자리하고 있던 이 탑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반환되어 경복궁에 복원된 과정은 문화재를 되찾아온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된다. 이 여정은 이동을 넘어 문화적 자존을 되찾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복원 과정에서의 선택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래 자리와 다른 공간에 세워졌지만, 이 탑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 궁궐이라는 공간과 어우러지며 왕권과 불교, 그리고 문화재 보존 문제를 함께 떠올리게 한다.
작품이 지닌 희소성은 조선 초기 일부 석탑에서 비슷한 형태가 다시 등장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규모와 완성도를 갖춘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이는 경천사지 십층석탑이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미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이 탑은 균형과 긴장의 아름다움을 함께 보여준다. 기단의 넓은 평면과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는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전달한다. 이는 구조를 넘어 보는 이의 감각까지 고려한 결과다.
종교적 의미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탑은 불교에서 사리를 모시고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구조물이다. 이 작품에 새겨진 다양한 존재들은 불교 세계를 눈에 보이게 표현하며, 신앙과 교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 이 탑은 과거의 유산을 넘어 현재에도 의미를 이어가고 있다. 문화재 반환과 복원의 역사, 그리고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흔적은 지금의 시각에서 문화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감상을 넘어 역사와 문화, 정치가 함께 얽힌 상징으로 자리한다.
결국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고려 후기 장인 정신과 국제적 문화 흐름, 그리고 근현대사의 굴곡까지 담아낸 복합적 유산이다. 이 탑을 바라보는 일은 한 시대의 미적 성취를 느끼는 데서 나아가, 문화가 이동하고 다시 해석되는 흐름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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