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전시현 기자 | 김종현 한국핀테크산업협회장은 2일 국회 세미나 인사말에서 “무역금융의 오래된 숙제를 풀 수 있는 가장 혁신적인 열쇠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라며 “한국이 주도하는 규제 친화형 도매 정산 레일을 구축해 원화 국제화와 디지털 통상 인프라 기반 선점에 나서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가 소상공인의 운전자본 부담을 덜고 원화 국제화를 촉진할 수 있는 전략적 계기라고 강조했다.
이날 국회에서 열린 스테이블코인 기반 무역금융 세미나는 가상자산 찬반 논쟁보다 무역결제 효율화에 초점을 맞췄다. 행사 전 공개된 안내에 따르면 이번 세미나는 달러 중심 결제 구조와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결제 환경을 비교하고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의 무역금융 접근성을 개선할 수 있는 정책·제도·금융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 수출 84.5%·수입 80.3% 달러 결제… 중소기업 부담 더 커
이날 논의의 출발점은 한국 무역의 높은 달러 의존도였다. 한국은행의 ‘2024년 결제통화별 수출입’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수출 결제의 84.5%, 수입 결제의 80.3%가 미 달러화로 이뤄졌다. 원화 결제 비중은 수출 2.7%, 수입 6.3%에 그쳤다. 달러 편중 구조가 여전한 만큼, 수출입 기업은 이중 환전 비용과 환율 변동 리스크를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발표자들은 특히 자금 여력이 작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일수록 이런 비용 구조에 더 취약하다고 봤다. 현지 통화를 달러로 바꾸고 다시 원화로 환전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누적되고, 송금 수수료와 정산 지연까지 더해지면 거래 규모가 작을수록 체감 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법률 발제를 맡은 차상진 법률사무소 비컴 대표변호사는 현행 제도 아래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자체를 직접 금지한 규정은 없다고 설명했다. 다만 준비자산의 예치와 보호, 법적 성격, 발행·유통 책임 구조가 충분히 정리돼 있지 않아 시장 신뢰를 확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외국환업무취급기관을 통하지 않고 스테이블코인으로 무역대금을 주고받을 경우 외국환거래법상 사전 신고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현실적 제약으로 제시됐다.
▲ 핵심은 결제수단이 아니라 정산 인프라
이날 세미나의 차별점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일반 소비자용 결제수단으로 확대하는 데 있지 않았다. 핵심은 이를 허가받은 사업자와 금융기관 사이에서만 활용하는 ‘규제친화형 디지털 무역결제 인프라’로 설계할 수 있느냐는 데 맞춰졌다. 즉 기업은 여전히 원화나 현지 법정통화로 거래하고, 스테이블코인은 뒤에서 정산 마찰을 줄이는 후방 인프라로만 쓰자는 구상이다.
김 회장도 같은 맥락에서 “기존 달러 송금 과정에서 발생하는 중개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정산 시간을 수분 내로 단축할 수 있다”며 “온체인 데이터를 통해 거래 흐름을 투명하게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강점”이라고 말했다. 스테이블코인을 투기성 자산이 아니라 실물경제 결제 인프라의 일부로 설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날 발표에서는 기존 SWIFT 체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 한계도 함께 거론됐다. 국제 송금은 중개기관을 여러 단계 거치는 탓에 정산 시간이 길고 비용도 높다. 반면 블록체인 기반 정산은 처리 시간을 크게 줄이고 거래 흐름을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안으로 거론됐다. 다만 전제는 분명했다. 개인지갑 허용이나 무허가 유통, 비무역 목적 송금 같은 리테일 확산이 아니라, 허가된 참여자 중심의 폐쇄형 실증이 먼저라는 점이다.
▲ 화이트리스트·문서기반 DvP·자국통화 입출금 원칙
정책 설계 방향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참여 법인과 주소를 미리 등록하는 화이트리스트 체계, KYB·KYC와 AML/CFT 내재화, 인보이스·선적·통관 서류와 정산을 연계하는 문서기반 DvP(Delivery versus Payment), 자국통화 입출금 원칙이 핵심 조건으로 제시됐다. 기업은 법정통화만 내고 받되 디지털자산은 허가된 사업자 간 정산에만 사용되도록 경계를 분명히 해야 감독 가능성과 추적 가능성을 함께 확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발표자들은 특히 한국과 인도네시아 간 거래를 시범 코리도로 거론했다. 달러를 거쳐야 하는 결제 구조가 뚜렷하고 무역 규모와 서류 기반 거래가 충분해 실증 효과를 가늠하기에 적합하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향후 대아세안 다중 코리도로 확장할 수 있는 출발점으로도 제시됐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느 나라와 먼저 시작하느냐보다, 복제 가능한 감독·운영 모델을 먼저 만들 수 있느냐는 데 있다는 평가다.
▲ 비용 절감 효과 기대…남은 과제는 제도 정비
경제성 분석도 제시됐다. 거래 1건당 5만달러를 가정할 경우 1단계 도입만으로 88.7bp, 고도화 단계에서는 164.3bp의 비용 절감 효과가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인도네시아 교역에서 침투율 5%만 달성해도 연간 1651만달러의 비용 절감 여지가 있다는 추정도 제시됐다. 소액 거래일수록 전신료와 중개수수료 비중이 커지는 만큼 이런 효과는 대기업보다 중소 수출입 기업에서 더 크게 체감될 수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다만 낙관론만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디페깅 위험, 발행자 신용 위험, 규제 불확실성, 자금세탁 방지 의무, 유동성 불균형, 사이버 리스크가 모두 핵심 위험요인으로 꼽혔다. 결론은 명확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무역금융에 적용하려면 시장에 먼저 풀고 사후 규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허용 범위와 참여자, 거래 유형, 보고 체계를 좁고 깊게 설계한 뒤 단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세미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투기성 가상자산 논쟁과 분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무역 현장에서는 이미 기술 가능성보다 제도 정비가 더 큰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달러를 한 차례 덜 거치는 것만으로도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남은 승부는 코인의 이름보다 국가가 어떤 규칙으로 그 통로를 열어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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