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은 푸른 나무, 훤칠한 청년의 풋풋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연신 꽃망울을 터뜨리는 벚꽃으로 거리가 화사하고 실바람에 반짝이는 호수의 물결이 싱그러운 안산 화랑공원에 자리한 경기도미술관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푸른 꿈과 마주한다.
■ 조각작품에 담긴 스무 살 경기도미술관의 꿈
봄빛이 감도는 경기도미술관(관장 전승보) 야외 정원은 평일에도 산책하는 시민들로 붐빈다. 경기도미술관이 야외에 설치한 조각작품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안내서를 따라 조각작품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본다. 처음 마주한 작품은 류인(1956~1999)이 1992년 제작한 ‘동방의 공기’이다. 가슴 아래부터 허리와 다리까지 사람의 모습인데 변형된 가슴과 목 사이에 코끼리의 코처럼 불쑥 튀어나온 것은 무엇을 형상한 것일까. 늘씬한 몸에 비해 아주 작은 남자의 얼굴, 벽을 움켜잡은 사내의 두 손에 억압과 구속을 허물려는 의지가 가득하다. 한국 근현대 조각계의 거장 김복진과 권진규의 맥을 잇는 작가로 평가를 받았다는데 43세로 일찍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최정화의 2008년 작 ‘꽃꽂이’는 경기도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이라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상적인 조각이다. 물이 채워진 수조에서 피어난 꽃과 열매, 잎사귀가 싱싱해 생동감이 넘치는 미술관을 만들어준다. 거대한 세 사람이 들판에 우뚝 서 있다. 최평곤의 2007년 작 ‘가족’이다. 1994년 동학 100주년을 맞아 공주 우금티에 대나무 인간을 설치했다는 작가의 손길이 어머니의 가슴처럼 따스하게 느껴진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피워 올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주거 공간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유영호의 ‘다섯 평의 꿈’(2010년)이나 경기도미술관의 건축 구조 속으로 스며들어 주변 환경과 호흡하며 친숙한 이야기를 만드는 최기창의 ‘배수로’(2010년)를 비롯해 미술관 주변에 33점의 매력적인 작품이 전시돼 있다.
■ 예술과 삶이 만나는 행복한 공간
지난달 26일 개막한 경기도미술관 20주년 특별기획전 ‘흐르고 쌓이는’은 볼거리와 생각거리 모두가 풍성하다. 관람객과 함께 예술과 삶의 접점을 찾는 특별기획전에 등장한 대표적인 소장 작품들이 어떤 것일까. “6월14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서 평면, 입체, 설치, 미디어, 비물질 등 다양한 형식의 경기도미술관 소장품 125점을 선보입니다.” 전시관에서 마련한 책자를 펼쳐 이 전시를 기획한 김선영, 나기연 두 학예연구사의 기획 의도를 살펴본다.
“지난 20년간 축적된 소장품 수집의 역사와 주요 기획 방향을 돌아보고 미술관의 정체성과 역할을 살피는 기획전입니다.” 미술관의 의도대로 ‘흐르고 쌓이는’이란 제목부터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니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흐르고 쌓이는’은 흐르는 시간 위에 사유와 질문이 쌓이며 의미가 확장되는 과정을 은유하는 말이 아닌가. 경기도미술관이 걸어온 지난 20년의 역사를 보여주는 첫 작품이 무척 궁금하다.
■ 무엇을 해 왔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번 전시는 ‘경기도미술관은 무엇을 해 왔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다소 무겁지만 피해 갈 수 없는 본질적 질문과 다시 마주한다. 서로 다른 시점과 환경에 탄생하고 수집된 소장품들이 다양한 시각을 가진 관람객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예술과 삶은 어떻게 만나는가”라는 질문과 “미술관은 관람객과 예술을 어떻게 연결하는가”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첫 질문 ‘예술은 ( ) 시작하는가’는 장르와 형식을 해체하고 매체를 실험하며 예술의 경계를 확장해 온 작품을 내세웠다. 관람객이 처음 마주하는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화가 유영국의 ‘산’이다. 1997년 미술관에 들어온 작품 ‘산’은 붉은색과 단순한 구성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실적인 그림에 익숙한 관람객에게 ‘산’이 전하는 신선한 메시지는 경기도미술관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박현기의 ‘무제’(1993년)와 권오상의 ‘아구스타’(2008년), 구본창의 ‘태초의 #13’(1998년) 같은 파격적인 작품을 통해 기존의 관습을 의심하고 형식을 전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과감하게 드러낸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조망하는 시간이 즐겁다.
다음에 마주한 질문은 ‘우리는 ( ) 살아가는가’다. 다양한 삶의 모습이 뒤섞여 표류하는 인간의 모습, 이를 둘러싼 감각, 삶의 궤적 등 다채로운 일상의 면면을 보여준다. 민정기의 ‘사람들’(1983~1989년), 박은태의 ‘녹색모듈’(2021년), 배영환의 ‘아주 럭셔리하고 궁상맞은 불면증’(2008년), 함양아의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2.0’(2019년) 같은 작품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을 비롯해 시공간과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는 모든 장소성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일상을 더듬으며 살아감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이끌어준다.
■ 당신의 과거는 행복한가.
이어지는 질문 ‘우리는 ( ) 기억하는가’는 흐려지고 잊히는 것들을 현재로 소환하는 예술을 살펴본다. 제주도 수난의 역사를 줄기차게 화폭에 옮긴 강요배의 ‘황파 1’(2002년), 윤석남의 ‘핑크 룸’(1996년), 양정옥의 ‘노인이 많은 병원 302호: 기억하는 사람’(2016년), 안규철의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읽기’(2016년) 같은 작품들은 흩어진 것을 모으고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한다. 무엇이 잊혀 가는지,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또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질문하며 경계 너머로 밀려난 이야기와 잊힌 목소리를 다시 호명한다.
‘예술은 ( ) 함께하는가’는 ‘관계 맺기’로 사회와 깊게 밀착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길어 올리는 작품을 보여준다. 이건용의 ‘동일면적’(1975년), 정정엽의 ‘최초의 만찬 2’(2019년), 권혜원의 ‘급진적 식물학’(2021년),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년) 같은 작품을 통해 연결하고 함께한다는 것에 대한 다양한 예술적 시도와 고민을 관람객과 공유한다. 함께 만들어 가는 예술의 경험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사유이자 실험이다.
미술관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나는 ( ) 실천하는가’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2024년 작품 54점을 기증한 민중미술 작가 김정헌의 작품들이 널찍한 전시 공간을 채우고 있다. 1980년대 ‘현실과 발언’을 주도한 작가는 스스로 낮춰 ‘옆집 예술가’로 자처하며 일평생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고민하며 이제는 멀어져 간 지난 시간을 차분히 돌아본다. 작품의 바탕이 된 스크랩은 물론이고 작가의 생각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메모도 전시하고 있다.
‘오직 나의 기억 속에서는’(1995년)과 ‘국가의 초상’(2014년)을 비롯한 작품은 ‘영매로서의 미술’을 화두로 삼아 미술이 사회적 행위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과 삶이 분리되지 않았던 작가의 일상도 엿볼 수 있다. 작품을 구상하며 휘갈겨 쓴 메모와 신문에 기고한 원고지까지 지난 세월과 작품을 더듬을 수 있는 흔적을 보여주는 방식이 재미있다.
■ 20년 앞을 내다보다
전시장에 마련된 관람객 참여 공간은 미술관과 소통하는 통로다. 전시실에 관람객인 ‘나’의 생각을 더해 보는 자리를 마련한 것도 재미난 발상이다. ‘나의 생각 더하기’ 코너에서 괄호 안의 단어를 채우며 경기도미술관의 다음 20년을 상상해 본다. 감상을 지원하는 소장품 카드와 쉬운 말로 풀어쓴 해설지를 미술관 곳곳에 배치한 것이나 장애인을 위한 음성 안내와 경기도미술관 전시 안내 애플리케이션을 병행 운영해 감상 환경을 조성한 것도 박수를 받을 일이다. 경기도미술관 건립 추진부터 현재까지 소장품 수집과 주요 전시를 알려주는 기록이 미술관 창문에 빼곡하다. ‘경기도미술관 1997-2025: 예술이 쌓여 흐름이 되다’는 지난 20년의 활동상을 통해 1천400만 경기도민을 향한 경기도미술관을 야무진 꿈을 보여준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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