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책금융이 동시에 움직였다. 1일 한국산업은행은 유럽 자본시장에서 10억 유로 규모 자금을 조달했고, 한국수출입은행은 인도네시아 국부펀드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며 동남아 사업 확장에 나섰다. 전쟁으로 글로벌 금융시장 변동성이 확대된 상황에서 외화 유동성과 해외 사업 기반을 동시에 확보한 조치로 평가된다.
겉으로 보면 정교하게 설계된 전략이다. 그러나 외환시장은 전혀 다른 신호를 보내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1500원대에서 등락을 반복하며 고점 구간이 고착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외화가 유입됐음에도 불구하고 통화 전반에 대한 긍정적 파급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같은 괴리는 자금이 실제로 이동하는 경로를 들여다보면 분명해진다
산업은행이 유럽 자본시장에서 조달한 자금은 명목상 유로화다. 그러나 해당 자금이 실제로 집행되는 단계에서는 그대로 사용되지 않는다. 글로벌 에너지, 원자재, 인프라 거래 대부분이 달러 기반으로 결제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로화는 달러로 전환되며, 유로화 조달은 자금 흐름의 출발점에 그치고 실질적인 운용 통화는 달러로 귀결된다. 이 과정은 유로화가 원화로 전환되지 않는 첫 번째 이유이자, 외화 유입에도 불구하고 원화 약세가 지속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이어지는 단계에서는 달러로 전환된 자금이 다시 해외로 유출된다. 수출입은행이 추진하는 인도네시아 사업은 핵심 광물, 전력망, 데이터센터 등 대형 프로젝트로 구성돼 있으며, 이들 역시 대부분 달러 기반으로 운영된다. 결과적으로 자금은 국내에 머물지 않고 동남아를 중심으로 한 정책금융 사업과 민간 해외투자 영역으로 재배분된다.
구조는 복잡해 보이지만 자금 흐름 자체는 단순하다. 유럽에서 유로화 자금을 조달한 뒤 이를 달러로 전환하고, 동남아 등 달러 기반 투자처에 투입하는 경로다. 이 과정에서 원화는 단 한 차례도 중심 통화로 기능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그대로 환율에 반영된다는 점이다.
외화는 유입되고 있지만 원화로 전환돼 시장 내에서 순환되는 속도와 규모는 제한적이다. 반면 달러 수요는 구조적으로 확대되는 흐름이다. 에너지 수입이 달러로 결제되고, 해외 투자 역시 달러 중심으로 집행되는데다, 금리 격차까지 작용하며 달러 보유 유인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시장에 축적되며 뚜렷한 신호로 작용한다. 달러는 필수 보유 자산인 반면 원화는 반드시 보유할 필요가 없는 통화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이다. 이러한 균형이 점차 무너지면서 환율은 강달러 방향으로 기울었다.
정책금융기관이 외화를 유입하면 그 자체가 환율 하락으로 이어지던 기존의 관행적 메커니즘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대신 외화 유입 → 달러 보유 유지 → 해외 재투자 → 원화 수요 부재로 이어지는 흐름이 구조화되고 있다. 환율이 1500원대에서 형성된 배경 역시 이러한 자금 순환 구조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산업은행의 유로화 채권 발행은 분명한 성과다. 낮은 가산금리로 자금을 조달하며 한국물에 대한 대외 신뢰를 재확인했다. 수출입은행의 전략 역시 방향성은 분명하다. 동남아 시장에서 사업을 선점하며 국내 기업의 확장 기반을 마련했다. 다만 두 정책이 맞물리는 지점에서는 한계가 드러난다. 자금은 유입되고 사업은 확대되지만, 통화 측면에서는 그 흐름을 흡수하고 원화 수요로 연결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외환시장은 보다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한국은 자금을 끌어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를 원화로 정착시키는 데는 실패했다는 시각이다. 자금은 유입되지만 원화로 전환되지 않고 다시 해외로 빠져나가는 구조가 고착되면서 환율 상승 압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피에르-올리비에 구리나샤(Pierre-Olivier Gourinchas)국제통화기금(IMF)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대외 불균형 보고서에서 “통화가치는 자본 유입 자체보다 자금이 해당 통화로 얼마나 유지되는지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엘렌 레이(Hélène Rey) 런던경영대학원(London Business School·LBS) 교수는 “글로벌 금융 사이클 하에서는 자본이 유입되더라도 기축통화 중심으로 재배치되며, 비기축통화는 자금 흐름의 중간 경로에 머물 수 있다”고 짚었다.
찰스 굿하트(Charles Goodhart) 런던정경대(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LSE) 명예교수는 “비기축통화 국가의 경우 자본 유입이 곧 통화 수요로 이어지지 않으며, 자금은 다시 외부로 순환하는 구조를 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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