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필자는 이전 칼럼에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대해 언급했다. 필자는 이 책이 카뮈가 보내는 현대 한국인에 대한 조언이라고 감히 선언한다. 배경 설명을 위해 잠시 카뮈의 1942년 작 '시지프 신화'의 내용을 정리해본다. 카뮈는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를 자신의 핵심 철학인 부조리 개념을 설명하는 상징으로 활용했다. 시지프는 신들의 벌로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려야 하지만, 정상에서 바위가 다시 굴러떨어져 영원히 이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한다. 그에게 부조리는 인간의 의미 추구와 무심한 세계의 침묵 사이의 충돌이다. 많은 이가 삶에서 의미와 목적, 질서를 갈망하지만, 우주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과연 시지프는 한국에서 행복할 수 있는가
시지프 신화에서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인간의 모습은, 현대인의 삶과 닮았다. 특히 오늘날 한국인의 삶은 이 반복적 노동과 놀라울 정도로 겹쳐 보인다.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려가지만, 도달하는 순간 또 다른 기준과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끝이 없는 상승과 추락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삶은 과연 의미가 있는가.
이처럼 카뮈는 그의 저서 '시지프 신화'에서 인간의 삶을 '부조리'로 규정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세계는 그 질문에 아무런 답도 주지 않는다. 이 간극, 즉 의미를 요구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충돌이 바로 부조리다. 시지프는 이 부조리의 상징이다. 산 정상까지 돌을 밀어 올려도 그것은 다시 굴러떨어진다. 그 노동에는 끝도, 보상도 없다.
그러나 카뮈는 여기서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위안을 거부한다. 언젠가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언젠가 의미가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는 또 다른 기만일 뿐이다. 대신 그는 시지프가 자신의 운명을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다시 돌을 향해 걸어 내려가는 그 순간에 주목한다.
바로 그 반항의 순간, 그 의식의 순간에서 인간의 존엄이 탄생한다고 본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부조리를 넘어, 훨씬 더 구체적이고 구조적인 부조리 속에 놓여 있다. 그것은 바로 '평균'이라는 이름의 정교한 감옥이다. 한국 사회는 생애 전 과정에 걸쳐 표준화된 경로를 요구한다. 정해진 시기에 대학에 진학하고, 일정 수준의 직장에 취업하고, 적절한 시기에 결혼하고, 주택을 마련해야 한다. 이 경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개인은 쉽게 '뒤처진 존재'로 규정된다.
문제는 이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향된다는 점이다. SNS와 미디어는 타인의 가장 빛나는 순간만을 끊임없이 노출하며, '평균'을 사실상 도달 불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이에 따라 현대 한국인은 단순히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되는 삶을 살게 된다. 돌을 밀어 올리는 행위 자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다른 사람이 더 큰 돌을 더 빨리 밀어 올리고 있다는 감각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인의 부조리는 카뮈의 시지프보다 더 복잡해진다. 시지프는 적어도 자신의 돌을 알고 있었지만, 현대 한국인은 그 돌조차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 사회가 정해준 기준, 타인의 시선, 그리고 체면이라는 압력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
카뮈의 해법은 명확하다. 부조리를 제거하려 하지 말고, 그것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자살도, 종교적 도피도 아닌 '인식'과 '지속'이 답이다. 삶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되, 그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실존적 태도다.
한국 사회에도 동일한 적용이 가능하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피로는 개인의 부족함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평균과 비교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구조를 절대적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실패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 기준 자체가 허구임을 인식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산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카뮈의 문장은 이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시지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돌이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노동이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나만의 돌'을 선택하는 용기다. 남들이 정해준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기준을 따르는 삶이다. 체면과 평균의 감옥은 끊임없이 정상 궤도에 합류하라고 요구하지만, 그 궤도의 끝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카뮈가 말하는 반항은 거창한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선택이다. 타인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는 것, 비교 대신 자기 경험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의미 없는 반복 속에서도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태도다.
이러한 실존적 태도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된다. 행복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가기로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타인이 만든 '평균'이라는 자로 자신의 삶을 재기를 거부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감옥의 문을 열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시지프는 더 이상 벌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현대 한국인 역시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노석준 RPA 건축연구소 소장
▲ 메타버스 및 가상현실 전문가 ▲ 미국 컬럼비아대ㆍ오하이오주립대ㆍ뉴욕파슨스 건축학교 초빙교수 역임 ▲ 고려대 겸임교수 역임 ▲ 현대자동차그룹 서산 모빌리티 도시개발 도시 컨설팅 및 기획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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