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팔레스타인 정당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군대와 서안 지구의 정착민들이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한 폭력을 중단하라는 의미로 공격을 감행했다고 밝혔다. 직전 4년 동안 수시로 가자 지구를 공습해 침공의 빌미를 줬던 이스라엘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지금도 진행 중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시작된 건 이 시점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난타전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엔 규모가 달랐다. 늘 두 국가가 싸울 때마다 화염으로 뒤덮이는 가자 지구에선 매일 민간인 사망자가 수도 없이 나왔다. 이스라엘의 폭격을 맞은 가자 지구에는 피라미드의 11배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잔해가 쌓였다.
가자 지구는 하마스가 집권 중이지만 20년 동안 이스라엘에 봉쇄된 지역이다. 아름다운 해변과 문화 유산 뒤에서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한 채 생지옥을 살아내야 한다. 영화 〈힌드의 목소리〉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약 3개월 후 피난 도중 폭격을 맞은 민간인 차량 안 생존자의 이야기다. 정확히는 가족의 시신 곁에서 홀로 살아남은 것이 6살 소녀였다는 끔찍한 사실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영화 〈힌드의 목소리〉
전쟁 3달 차, 팔레스타인 구호 단체 적신월사의 북가자지구 콜센터는 구조를 요청하는 시민들의 아우성으로 분주하다. 다른 콜센터는 파괴됐고 구조 현장으로 나갈 대원조차 한 팀만 살아 남은 상황. 적신월사의 자원봉사자들도 항상 전쟁의 공포 곁에서 일한다. 그러나 가끔은 웃기도 할 만큼 일상을 찾아나가는 중이다. 이들이 짓는 미소는 언제 원상복구될지 모를 아비규환을 버텨내는 마취제처럼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적신월사에 독일에서 발신된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대피 중 폭격을 맞은 차량이 있는데 탑승자를 구해 달라는 것이다. 해당 지역은 이스라엘에 봉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곳이었다. 구조대와 구조 요청 지역의 거리는 차로 단 8분. 하지만 구조대를 보냈다가는 모두가 죽을 것이 자명한 국면이다.
영화 〈힌드의 목소리〉
이럴 때 적신월사가 밟는 절차를 '조정'이라고 부른다. 우선 적십자에 연락해 현 상황에 대해 알린다. 그러면 적십자가 이스라엘 군대로 협조 요청을 한다. 정해진 경로로 구조대를 보낼 테니 폭격을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스라엘군의 검토 결과가 적십자로 전해지면 그때부터 구조대 투입 여부를 결정한다. 거쳐야 하는 집단도 많은데 이해관계가 충돌하다보니 이 과정이 마무리될 때까지 대개 9시간에 달하는 시간이 걸린다. 구조가 정상적으로 이뤄질 리 만무하다.
최초의 구조 요청 전화는 폭격을 맞은 차량에 탄 이들의 친척이었다. 반드시 거쳐야 하는 '조정' 때문에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이 희박한 경우 대응이 애매하다. 이때 봉사자 오마르가 탑승자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 본다. 전화를 받은 라얀은 '모두가 죽고 자신과 힌드'만이 남았다며 도와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그 순간 이스라엘군의 총격이 시작되고 비명 소리와 함께 연락이 끊긴다. 모두가 희망을 거둔 사이, 오마르는 여섯 살 힌드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 〈힌드의 목소리〉
지척에 있는 힌드를 당장 구하러 갈 수 없는 오마르는 발을 동동 구른다. 하지만 조정 절차를 밟지 않은 구조는 결국 죽음 말고 남는 것이 없는 상황이다. 빨리 조정을 하라며 담당자를 닦아 세워 봐도 결국 의사 결정권은 이스라엘군에게 있다. 봉사자는 힌드와 계속 통화를 하고, 뒤에서는 조정 절차가 진행된다. "나를 버리지 말라"는 힌드의 말에 "기다리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적신월사를 채운다. 다섯 시간 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출발한 구조대. 하지만 그들이 힌드가 탄 차를 발견한 순간, 전화 너머로 총성이 울리고 연락은 끊긴다. 모두의 생사를 확인한 건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한 12일 후였다.
영화 〈힌드의 목소리〉
〈힌드의 목소리〉는 차에 갇힌 라얀과 힌드의 실제 음성을 바탕으로 전쟁의 참상과 당시 적신월사가 겪는 감정의 파고를 그대로 재현했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공통적으로 안길 묵직한 괴로움은 전쟁 피해자들이 맞이한 실제 죽음의 순간을 목도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힌드에게 "당장 구조를 하러 갈 수 없다"는 말을 하지 못해 내내 다른 이야기만 걸다가 결국 신을 찾고 마는 봉사자들의 무력감은 이내 분노로 바뀐다. 해탈할 수밖에 없는 천재지변과 오로지 인간 탓에 벌어지는 전쟁은 다르다. 분명 벌어지지 않아도 될 일 앞에서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이 손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죽어 나간다.
〈힌드의 목소리〉는 숱한 희생과 더불어 전 인류가 짊어질 무력감이 전쟁의 실체고 결과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인간의 힘 탓에 벌어진 일을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건 얼마나 허무한가. 끝나기는 커녕 규모를 불려가는 전쟁의 포화는 또 얼만큼의 불안으로 인류를 잠식할 것인가. 질문 밖에 할 수 없음에 괴롭더라도, 이 영화를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또 다른 〈힌드의 목소리〉가 다시 나오지 않길 바란다면 말이다. 4월 1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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