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들이 이제 법적 기반 위에서 보건의료의 주체로 당당하게 권리를 누리고 정책 결정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됐다. 환자단체와 국회의 노력으로 마침내 ‘환자기본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
환자기본법안 제정 운동은 의정갈등과 전공의 집단사직에 의한 진료공백 사태가 절정이었던 2024년 7월 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광장에서 시작됐다. 이날 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한국환자단체연합회·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소속 환자와 환자가족 400여명은 ‘의료정상화와 재발방지법 입법을 촉구하는 집회’를 개최했으며 이때부터 환자단체는 법 제정 운동을 본격 시작했다.
2024년 12월 3일 남인순 의원이 「환자기본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법안 심의는 약 1년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한국환자단체연합회와 소속 환자단체들,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는 2025년 7월 22일부터 12월 16일까지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100일 동안 「환자기본법안」의 신속한 국회 통과를 촉구하는 릴레이 1인시위를 진행했다. 이후 올해 1월 6일 남인순 의원이 「환자안전법」 내용을 2024년 발의했던 「환자기본법안」 내용과 통합한 「환자기본법안」을 새로 대표 발의하면서 3개월 만에 국회를 최종 통과한 것이다.
환자기본법안에는 ▲법의 목적과 정의 ▲환자정책 기본계획 마련 ▲실태조사 ▲환자정책위원회 구성 및 운영 ▲환자 정책의 환자참여 ▲환자통합지원센터 설치 및 운영 등 크게 6개의 내용이 담겼다.
해당 법안은 환자 중심의 보건의료 환경 조성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환자가 신체·정신·사회적으로 건강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을 목적으로 한다.
또 복지부장관이 환자 정책에 관한 기본계획을 5년마다 수립 시행하고 3년마다 환자정책 실태조사를 실시, 그 결과를 공표하도록 돼 있으며 기본적인 정책을 종합·조정하고 심의·의결하기 위한 복지부장관 소속의 환자정책위원회를 두게 돼 있다. 아울러 환자 정책 결정과정에 환자 또는 환자단체가 참여, 다양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도록 했으며 또 복지부장관이 환자통합지원센터를 설치·운영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즉 환자를 더 이상 치료의 객체가 아닌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고 환자가 능동적으로 투병할 수 있는 환경과 정책 참여의 정당한 법적 근거가 만들어진 것이다.
법안 제정의 첫 시작을 연 환자단체는 논평을 통해 적극 환영의 입장을 표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는 31일 논평을 발표하고 환자기본법 제정은 다섯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첫째, 국가 차원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환자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법적근거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환자기본법에는 환자와 환자단체의 정의, 환자의 권리와 의무, 실태조사, 환자정책 기본계획과 시행계획, 환자정책위원회 설치, 환자 또는 환자단체의 정책 참여와 의견 청취 보장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이제 환자정책은 국가가 중장기 계획과 책임 아래 체계적으로 추진해야 할 정책 영역으로 자리잡게 됐다.
둘째, 환자와 환자단체의 정책 참여가 제도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이다.
그간 우리나라 법률에는 ‘환자단체’의 법적 정의가 없어 환자단체가 정부나 공공기관의 정책 결정 과정에 독자적 주체로 참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른 법률에 근거한 단체의 지위를 빌리지 않고도 환자단체로서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게 됐다.
셋째, 우리나라도 환자중심과 환자참여를 지향하는 기본법 체계를 갖추게 됐다.
환자기본법안은 2016년 제정된 환자안전법의 내용을 통합, 환자의 권리 보장과 환자안전 증진을 하나의 기본법 체계 안에서 다뤘다. 환자의 안전하게 치료받을 권리를 비롯한 12개의 권리가 보다 분명하게 규정됐고 환자안전활동도 더 이상 의료기관 내부의 보고체계만 머무르지 않고 환자와 보호자도 환자안전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넷째, 환자안전사고 재발 방지 체계가 강화됐다는 점이다.
추가 조사가 필요한 환자안전사고에 대해 중앙환자안전센터가 직접 조사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의료기관에 개선 활동의 수립·이행을 요청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조사과정에서 수집된 자료와 진술, 조사 결과는 재판에서 불리한 증거로 사용되지 않도록 보호해 의료기관의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게 했다. 아울러 개선활동 이행 실적이 우수한 의료기관에는 국가가 기술적·행정적·재정적 지원과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환자안전사고를 은폐와 책임 공방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학습과 재발 방지로 연결하는 체계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전이라는 평가다.
다섯째, 5월 29일을 ‘환자의 날’로 공식 지정했다는 것이다.
이번 법안에는 매년 5월 29일을 ‘환자의 날’로 정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환자정책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관심을 높이기 위한 교육·홍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5월 29일은 2010년 항암제 빈크리스틴 투약오류로 세상을 떠난 정종현 어린이의 기일이다. 종현이 부모는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4년 7개월간 노력해 이른바 ‘종현이법’인 「환자안전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종현이의 기일을 ‘환자의 날’로 정한 것은 환자안전과 환자 권리가 구체적인 희생과 사회적 교훈 위에 세워진 가치임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환자단체는 다음 과제로 하위 법령과 제도를 조속히 정비해 이 법률이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임을 강조했다. 그래야만 환자의 투병과 권리를 실질적으로 증진·보호하는 법률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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