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외교문서…김일성 사망 이듬해에도 최고지도자 직책 안 맡자 각국 촉각
황장엽, 탈북 2년전 "北도 경제적 실용노선 갈 수밖에…정책전환 필요"
(서울=연합뉴스) 김효정 기자 = "현재 김정일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자동차 사고와 지병 때문) 아직까지 주석직을 승계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덩샤오핑 차녀 덩난 중국 국가과기위 부주임, 1995년 3월 주중 한국대사와 면담에서)
"김정일은 인민들이 아직도 김일성을 애도하고 있는데 아들이 어떻게 취임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고…."(1995년 4월 주중 한국대사관의 공산당 대외연락부 조선처장 대상 탐문 보고)
김일성 주석이 1994년 7월 8일 사망한 뒤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3년 이상 최고지도자로서 어떤 직책에도 취임하지 않으며 이른바 '유훈통치'를 이어갔다.
이미 1970년대 초부터 후계체제를 구축해온 그가 공식적 권력 승계를 미루는 배경을 두고 외부 세계에서는 의문이 일었다. 이는 곧 김일성 사후 북한 체제의 안정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31일 공개된 1995년도 외교문서에는 북한이 김일성 사망 이듬해에 접어들도록 권력승계에 나서지 않는 이유에 한국을 비롯한 각국이 촉각을 곤두세운 기록이 생생히 남아 있다.
외교가에서 단골로 제기된 원인 중 하나는 '건강 이상설'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3월 한독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당뇨병 내지 신장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10월까지 공식 승계가 이뤄지지 않으면 건강 이상이나 내부 권력투쟁 등을 의심해도 좋다는 중국 측 정보를 소개했다.
같은 해 1월 중국 랴오닝성 외사판공실 부주임도 북한 공관원과 접촉해 들었다며 취임이 늦어지는 배경으로 건강 문제를 거론했다. 업무량으로 보아 직책 수행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있다며 '2년 전 낙마 후유증' 등의 소문을 전했다.
당시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된 점도 거론됐다.
중국 외교부 아주국 조선처장은 2월 한국대사관 인사와 만나 "국가주석직을 공식 승계하게 될 경우 당장 남북한 정상회담을 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므로 이를 피하기 위한 측면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북한 측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김일성에 대한 '효성'이었다. 김정일이 '3년상'을 치르며 주위의 간청에도 새 직책을 수락하지 않았다는 식의 선전은 수년 뒤까지 북한 관영매체에서 이어진다.
김정일은 1997년 10월에야 노동당 최고 직책인 총비서에 추대됐다. 김일성이 지녔던 국가 최고 직책인 주석직은 이듬해 최고인민회의에서 폐지했다.
1995년 당시 북한 체제는 녹록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특히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는데, 1995년 6월 방북한 박한식 미국 조지아대 교수에게 김용순 노동당 비서가 미국의 쌀 지원을 희망하기도 했다.
박 교수가 '미국의 식량 원조를 받는 국가의 자존심과 국제적 체면 문제도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그런데도 미국의 식량 지원을 바라느냐고 하자 김용순은 "우리가 그렇게 어렵소"라고 답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해 7∼8월에는 대홍수까지 북한을 덮쳤다.
외교부는 12월 내부 보고서에서 "만성적인 식량난·에너지난으로 대변되는 경제 난국의 극복이 김정일 체제의 최우선 과제로서 경제난 해결 실패 시 체제 위협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분석했다.
한편 현재까지도 최고위 탈북 인사로 남아 있는 황장엽 당 비서가 탈북 2년여 전 북한의 '정책전환' 필요성을 거론한 점도 이번 외교문서로 공개돼 눈길을 끈다.
그는 1995년 3월 방북한 중국 베이징 조선족실업가협회 일행에게 "북한도 이제 계급투쟁이나 이념 논쟁의 시기에서 벗어나 경제적 실용 노선으로 갈 수밖에 없는 시대 상황에 처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1997년 2월 12일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전격 망명해 북한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이밖에 전 주한 불가리아 대사대리가 김정일과 김일성대에서 함께 수학하며 친밀하게 어울렸던 회고담, 미국의 세계적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팬인 김정일이 토니 남궁 전 UC버클리 한국학 연구소 부소장에게 카퍼필드 방북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기록 등이 외교문서로 공개됐다.
kimhyo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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