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파운드 영국인의 역설
」호주 애들레이드의 한 호텔에서 하필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먹던 중, 〈이스케이프〉라는 지역 일간지에 난 영국 여권에 관한 기사를 봤다. 한 법률가가 독자들의 질문에 답해주는 섹션이었는데, 질문이 이상했다. "제 남편과 저는 모두 1920~1930년대에 호주로 이민 온 영국인 부모님을 두고 있어요. 우리도 영국에 가려면 영국 여권을 발급받아야 하나요?" 나는 이게 대체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서 그 질문만 서너 번을 읽었다. 답변은 더 황당했다. “1983년 1월 1일 이전에 영국 밖에서 태어난 사람 중 아버지가 영국인이고 다음 조건을 충족한다면 자동으로 영국 시민권자로 간주합니다.” 조건이랄 것도 별 게 없었다. 어머니의 국적과는 상관없이 영국 시민권 자격이 있는 아버지와의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자동 영국 시민이다. 영국인이 아닌 사람은 ETA(Electronic Travel Authorisation)를 신청하면 영국에 입국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이 ‘자동 영국인’들은 타국인이 아니므로 영국 여권이 있어야만 영국에 입국할 수 있다. 그러니 질문자와 남편은 영국을 방문하려면 지금 당장 영국 여권을 신청해야 한다는 것.
영국은 이미 2023년부터 ETA를 시행했지만, 그동안은 자동 영국인에게도 발급해 주며 느슨하게 관리해 오다가 올해 2월 25일부터 항공사들을 통해 강제 집행에 들어갔다. 이제 자동 영국인은 ETA를 신청할 수가 없고, 계도 기간인 지난해에 받아둔 ETA도 사용할 수 없다. 여권 신청에 걸리는 보통의 시간은 자그마치 10주. 인터넷 게시판에는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아버지의 고향에 갈 계획이 무산됐다’는 등의 글이 올라온다. 심지어 1983년 1월 1일 이후 출생자는 부모 중 한 명만 영국인이면 무조건 자동 영국인이다. “내가 영국인이었다니”라는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이 자동 영국인 법이 호주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국가에 적용된다. 미국과 캐나다도 혼란에 빠졌지만, 가장 큰 난리를 겪는 건 호주다. 호주는 사실상 영국인의 나라기 때문. 1945년부터 1972년까지 영국과 호주 정부는 ‘10파운드 이민 정책’을 펼쳤다. 영국인이라면 단돈 10파운드에 정부에서 이민 비용 일체를 내고 호주에 정착하게 해주는 이 정책으로 당시 100~130만 명의 영국인이 호주에 정착했다. 이 ‘10파운드 영국인’의 자녀들은 거의 모두가 자동 영국인이고 지금 영국 여권을 신청하느라 정신이 없다. 영국 핏줄을 가진 사람이 다른 국적자보다 피해를 보는 ‘10파운드 영국인의 역설’인 셈이다.
사실 이는 영국의 국경 통제 기조에 딸려 온 부작용 중 하나다. 브렉시트 이전 EU 여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영국에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강행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국경 관리의 통제권을 되찾겠다는 것이었고, ETA는 그 핵심 수단 중 하나다.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미국인들이다. 미국에선 미국인이 다른 나라 여권으로 출국할 수 없다. 결국 미국에 사는 자동 영국인들은 영국으로 출국할 때는 미국 여권을, 영국으로 입국할 때는 영국 여권을 사용해야 한다.
지금 한창 경제 활동 중인 대한민국의 우리 세대는 삶의 대부분을 '세계화 시대'라는 거대한 기치 아래 보냈다. 아마 코로나 전까지 이어진 30년은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국가 간 이동의 비용이 가장 저렴한, 매우 유별난 시기였을 것이다. 오사카 항공권이 3만원에 나오고, 대부분의 국가가 ETA나 ESTA 없이 자유롭게 서로를 받아주던 시기. 국경 없는 여행의 호시절이 점점 끝나가고 있다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잡힌다.
Copyright ⓒ 에스콰이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