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성이 다가오더니 자신이 짚고 있던 등산스틱을 내밀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 뒤로도 스틱을 내미는 사람, 붕대를 꺼내는 사람, 발목을 직접 주무르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지난 주말 관악산 하산길에서 벌어진 일이다.
관악산 등산객들 / 뉴스1 자료사진
‘어제 남편분 관악산 다녀오신 분’이란 제목의 게시물이 30일 인터넷 커뮤니티 82쿡에 게재됐다. 전날 관악산에서 발목을 삐었는데 여러 등산객 덕분에 무사히 내려왔다는 내용이었다.
글쓴이는 모처럼 관악산 연주대를 완주하고 신이 나서 하산하다가 방심한 사이 발목을 삐끗했다고 했다. 산 중턱에서 발목을 잡고 쩔쩔매고 있는데 구원의 손길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지나가던 중년 남성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더니 자신이 짚고 있던 등산스틱을 내밀었다. 글쓴이와 그의 가족이 극구 사양하자 그는 "이거 어차피 버릴 거라 쓰셔도 된다"고 했다. 30년 된 스틱을 버린다는 말이 영 믿기지 않았다.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글쓴이도 금세 알아챘다. 남성은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산을 내려갔다.
도움의 행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틱 하나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내려오는 일행을 본 중년 여성이 다가오더니 "하나로는 힘들다"며 자신의 스틱 두 개를 통째로 건네려 했다. 또 다른 등산객은 가방을 뒤지더니 압박 붕대를 꺼내 들었다. 의료계 종사자로 보이는 등산객은 글쓴이를 앉혀놓고 발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두드리며 응급처치를 해줬다. 글쓴이는 "솔직히 처음엔 좀 무서웠다"면서도 "덕분에 훨씬 나아졌다"고 말했다.
글쓴이는 "당시엔 아픈 것에만 신경 쓰느라 감사하다는 말만 하고 보내드렸는데, 집에 와서 생각하니 너무나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고 했다. 남편도 크게 감동해 "대가 없이 받은 선한 행동을 나도 꼭 누군가에게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고 전했다.
인터넷에서는 흔히 '오지랖'이 민폐의 대명사처럼 쓰이지만 산에서만큼은 그 오지랖이 누군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댓글에도 비슷한 기억들이 쏟아졌다.
한 누리꾼은 "20대 때 한라산에 생수도 없이 무작정 올랐다가 탈수 직전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배즙 한 봉지를 건네줬다"며 "그때 그 생명수 같은 배즙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뒤로는 나도 산에 갈 때 간식을 넉넉히 챙겨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나 두리번거린다"고 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학창 시절 지리산 극기훈련 도중 탈수와 저체온증으로 쓰러질 뻔했을 때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초코바, 오이, 양말까지 꺼내줬다는 경험담을 전했다. "그게 한국인의 정"이라는 말에 많은 이가 공감했다.
댓글 중에는 더 뭉클한 사연도 있었다. 한 누리꾼은 극단적 선택을 하러 산에 오른 젊은 여성이 올라가는 내내 낯선 등산객들로부터 바람막이, 신발, 양말, 먹을거리를 하나씩 얻다 보니 정상에 닿았을 때는 마음이 바뀌어 살아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글쓴이는 게시글 말미에 "혹시 어제 관악산에서 푸른 등산복을 입고 스틱을 주신 남편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꼭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선뜻 건넨 스틱 하나가 어느 가족의 하산길을 환하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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