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 여성 탈의실에 남성들이 무단으로 들어와 알몸 상태의 여성과 마주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현행법상 '고의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처벌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법 제도 개선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30일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따르면 '탈의실 안 성별이 다른 사람이 무단 출입 시 처벌 요청에 관한 청원'이라는 제목의 글이 4385명 동의를 얻은 상태다.
청원인 A씨는 "얼마 전 헬스장 샤워·탈의실에서 두 남성과 마주치는 상황을 겪었다"며 "당시 알몸 상태였고, 극심한 스트레스와 수치심을 느꼈다"고 밝혔다.
충격을 받은 A씨는 가해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절망적이었다. 경찰은 "고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으면 형사 처리가 어렵고 민사 소송을 진행해야 한다"고 안내했다. A씨는 답답한 마음에 변호사 상담을 받고 관할 지방자치단체에도 문의했지만 "두 남성에게 과태료나 처벌을 내릴 규정이 없다"는 동일한 답변만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줄" 황당한 해명
A씨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헬스장 관리자의 태도였다. A씨에 따르면 사건 당시 탈의실 안 선반 위에는 휴대전화와 텀블러가 놓여 있었고, 바닥 바구니에는 가방과 벗어놓은 겉옷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관리자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피해자인 A씨는 사건 발생 장소가 개인 소유 공간이 아닌 데다, 당시 알몸 상태였기 때문에 고의성을 입증할 증거를 스스로 확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탈의실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CCTV 설치가 제한된다는 점도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A씨는 "가해자가 '시설 점검 중이었다'거나 '착오로 들어갔다'고 주장하면 고의성이 조각돼 대부분 무혐의로 종결될 가능성이 높다"며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가해자는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처벌 규정의 공백, 피해자는 분통
현행 성폭력처벌법 제12조는 가해자에게 '성적 욕망을 만족시킬 목적'이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대법원 판례는 이를 엄격하게 해석한다. 단순히 이성 화장실에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구체적인 추행이나 촬영 시도 등 부가적인 행위가 증명되어야 한다.
지난 2018년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의 남자화장실에 출입한 여성을 남성들이 신고했으나 경찰은 '성적 욕망'이 없다는 이유로 "형사책임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현행법은 가해자가 입구에서 기웃거린 정도로는 처벌이 어렵고 실제 범행 직전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죄를 묻는 구조다. 가해자가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거나 "시설 고장을 확인하러 들어갔다"고 주장하면 고의성이 부정된다. 피해자가 느끼는 실질적인 위협과 법적 유죄 판결 사이의 괴리가 크다.
반면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성별 분리 공간에 허가 없이 들어가는 행위 자체를 무단 침입으로 보아 즉각적인 제재를 가한다. 성적 목적 여부와 상관없이 공간의 평온을 깨뜨린 행위 자체에 책임을 묻는 방식이다.
형사 처벌이 어렵다면 과태료를 부과하는 '행정 제재'를 신설하자는 대안이 제기된다. 성폭력 범죄로까지는 보지 않더라도 공중도덕과 사생활 침해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취지다.
일각에서는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가 성적 목적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하게 하는 '입증 책임의 완화'를 주장한다. "몰랐다"는 변명만으로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이유(긴급 상황, 명확한 수리 지시 등)를 제시하지 못하면 처벌할 수 있도록 요건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A씨는 "교통법규 위반은 실제 피해가 발생하지 않아도 신고만 되면 과태료가 부과된다"며 "그러나 성별이 엄격히 분리된 공간에서 피해자가 발생했음에도 고의성과 반복성이 입증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는 현실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제도 개선 시급
이번 사건으로 A씨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는 "현재 극심한 불안 상태로 정신과와 한의원 치료를 병행하고 있으며, 가해자의 차량이나 헬스장 앞을 지나기만 해도 과호흡 증상이 나타난다"고 호소했다.
A씨는 "이런 일은 남의 일이 아니며, 내 가족·지인·남녀노소 누구든 당할 수 있는 일"이라며 "탈의실과 같은 성별 분리 공간에서의 무단 출입에 대해 명확한 처벌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실수라도 타 성별 탈의실에 들어갔으면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 "고의성 입증을 피해자가 해야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며 법 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번 청원은 성별 분리 공간 침입 사건에서 △고의성 입증의 어려움 △처벌 규정의 부재라는 두 가지 구조적 문제를 정면으로 부각시켰다. 해당 청원은 만료일인 내달 5일까지 5만명의 동의를 얻으면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돼 관련 법 개정 등 공식 심사 절차에 들어가게 된다.
피해자가 존재해도 처벌할 가해자가 없는 법의 공백. 이번 청원이 실질적인 입법 논의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고의성 조각=범죄 성립 요건인 ‘고의’가 인정되지 않거나 부정되는 경우를 뜻한다. 행위자가 결과 발생을 인식·의도하지 않았거나, 정당행위·긴급피난 등으로 위법성이 배제되는 상황에서 적용된다. 이 경우 형사책임은 성립하지 않거나 감경될 수 있다.
☞성폭력처벌법 제12조=‘성적 목적을 위한 다중이용장소 침입행위’를 규정한다.자기 또는 타인의 성적 욕망을 유발·만족시킬 목적으로 공중화장실, 목욕탕, 탈의실 등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장소에 침입하거나 퇴거 요구에 불응할 때 성립하는 범죄다. 위반 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여성경제신문 이상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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