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간의 군사적 충돌로 촉발된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국내 실물 경제의 급소를 정조준하고 있다. 원유 가격 상승이 '석유화학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 수급 불안으로 이어지면서, 이를 원료로 사용하는 산업계 전반에 비상이 걸렸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기초 자재 수급에 차질을 빚고 있는 건설 현장은 공정 중단과 입주 지연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 직전에 내몰리고 있다. 특히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선을 돌파하면서 나프타 가격이 상승했다. 이는 플라스틱, 합성고무, 섬유뿐만 아니라 건설 현장의 필수 자재인 단열재, 방수재, 페인트 가격을 밀어 올리는 기폭제가 됐다.
업계 관계자는 "나프타는 모든 기초 소재의 시작점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발생한 병목 현상은 시간 차를 두고 산업 생태계 끝단까지 전이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건설업계는 이미 직격탄을 맞은 상태다. 아파트 내장재와 외벽에 쓰이는 스티로폼(EPS) 및 우레탄 단열재는 나프타에서 추출한 폴리우레탄과 폴리스티렌이 주원료다. 나프타 수급 불안이 이어지자 이들 자재의 가격은 전년 대비 30~50% 이상 급등했다.
가격 상승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품귀 현상'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전화 한 통이면 오던 단열재와 방수재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이제는 현장 소장들이 직접 제조 공장을 찾아가 읍소해야 할 판"이라며 "페인트나 접착제 같은 마감재도 공급이 들쭉날쭉해 공사기간 맞추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토로했다. 이어 "마감 공사 단계에서 필수적인 자재들이 공급되지 않으면 후속 공정 전체가 멈춰 설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자재 수급 불균형은 결국 '입주 지연'이라는 소비자 피해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준공을 불과 몇 달 앞둔 현장에서 마감 공사가 중단될 경우, 수천 가구의 입주 날짜가 뒤로 밀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입주 지연에 따른 지체상금 부담까지 겹치면 중견 건설사들의 재무 건전성은 순식간에 악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건설의 기초인 레미콘 업계의 상황은 더욱 위태롭다. 나프타 불안과 연동된 경유 가격의 급등은 레미콘 트럭(믹서트럭) 운송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여기에 원자재난으로 건설 현장 자체가 멈춰 서면서 레미콘 수요마저 급감하는 '수요 절벽'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업계에선 이대로 한두 달만 상황이 지속되면 영세 레미콘 업체들부터 줄도산할 것이라는 괴담이 현실화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아울러 이번 나프타 수급 불안이 단순한 건설업계의 위기를 넘어 국내 산업 전반의 스테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을 가속화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나프타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 구조상 원가 상승 압박은 전방위적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어서다.
문제는 앞으로의 전망도 밝지 않다는 것이다. 중동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지 않는 한 에너지 가격의 변동성은 상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는 정부의 유류세 인하 폭 확대와 건설 자재 수급 조절 기구 운영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중장기적으로는 나프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원료 다변화가 과제로 꼽힌다. LPG(액화석유가스)를 원료로 사용하는 PDH(프로판 탈수소) 공정 비중을 높이거나, 폐플라스틱을 재활용한 열분해유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의 위기는 개별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섰다"며 "정부가 민관 합동 비상대책반을 가동해 원자재 수급 상황을 실시간으로 점검하고, 건설 현장의 공기 연장에 따른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성대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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