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 TV 드라마의 주류가 로맨틱 코미디나 가족 중심의 휴먼 드라마였다면, 최근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글로벌 및 로컬 OTT 플랫폼이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자극적이고 밀도 높은 오리지널 장르물을 쏟아내면서, 레거시 미디어(TV 채널) 또한 시청자의 높아진 눈높이와 장르적 선호도에 발을 맞추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적 제재, 잔혹한 범죄, 수위 높은 묘사 등이 안방극장의 핵심 소재로 자리 잡았다. 현재 방영 중인 주요 작품들을 통해 이러한 변화의 단면을 짚어본다.
권력 카르텔과 성접대 잔혹사, 〈클라이맥스〉
ENA 월화드라마 〈클라이맥스〉 스틸
ENA 월화드라마 〈클라이맥스〉 스틸
ENA 월화드라마 〈클라이맥스〉는 대한민국 최상위 권력층에 진입하려는 검사 방태섭(주지훈)과 그의 아내 추상아(하지원)의 치열한 생존극을 다룬다. 총 10부작 중 초반부를 지나는 현재, 4%대라는 준수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흥행 궤도에 올랐다. 극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연예계 성접대, 협박, 살인교사 등 수위 높은 범죄 기제들이다. 주목할 점은 해당 채널의 전작 〈아너: 그녀들의 법정〉과 후속작 〈허수아비〉 역시 성범죄와 연쇄살인을 주요 소재로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특정 채널이 선명한 장르물을 통해 충성도 높은 고정 시청층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편성으로 풀이된다
오컬트와 법정물의 결합, 죽음의 재구성 〈신이랑 법률사무소〉
SBS 금토드라마 〈신이랑 법률사무소〉는 변호사 신이랑(유연석)이 망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과정을 그리며 오컬트와 법정물을 결합했다. 피해자가 귀신의 형태로 나타나 사건을 의뢰하는 구조상, 극 중 다뤄지는 에피소드는 자연사나 사고사보다는 타인에 의한 ‘살인’에 집중된다. 매회 반복되는 잔혹한 살해 동기와 방식의 묘사는 법정물이라는 장르적 틀 안에서 범죄의 자극성을 극대화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로맨스마저 삼킨 범죄 서사, 〈세이렌〉
전통적인 로맨스 장르조차 범죄의 틀 안에서 재해석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tvN 월화드라마 〈세이렌〉은 수석 경매사 한설아(박민영)와 보험 조사관 차우석(위하준)의 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 동력은 '보험 사기'와 '의문의 죽음'이라는 범죄 사건에서 발생한다. 치명적인 관계 뒤에 숨겨진 IT 기업 CEO 백준범(김정현)의 실체와 살인 혐의를 추적하는 과정은, 이제 순수한 멜로만으로는 시청자의 흥미를 자극하기 어렵다는 제작 현장의 냉정한 판단을 짐작하게 한다.
부동산 잔혹극이 된 범죄종합세트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
제목만으로는 부동산 시장의 현실을 다룬 풍자극처럼 보이는 tvN 토일드라마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은 실상 납치, 감금, 살인이 난무하는 범죄물에 가깝다. 생계형 건물주를 표방하는 주인공 기수종(하정우)을 비롯해 김선(임수정), 민활성(김준한) 등 평범한 소시민으로 설정된 인물들조차 극이 전개될수록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행위에 가담한다. 빌런 집단뿐만 아니라 선인으로 설정된 인물들까지 범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설정은 현재 드라마 시장이 추구하는 ‘장르적 쾌감’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장르물의 범람, 그 너머의 과제 }
드라마 속 범죄 묘사가 빈번해진 현상은 OTT 플랫폼과의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TV 채널들의 고육지책이자, 보다 강렬한 서사를 원하는 시청층의 니즈가 반영된 결과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보다 극단적인 상황 속의 인간 군상을 조명하는 것이 시청률 확보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셈이다. 다만, 반복되는 잔혹성과 범죄 소재의 고착화가 드라마의 다양성을 저해하고 시청자의 피로도를 높일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시선 또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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