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통화의 의미가 바뀌고 있다. 과거의 기축통화가 국가의 신뢰와 군사력, 금융 시스템 위에 세워졌다면 앞으로의 기축통화는 네트워크와 플랫폼 그리고 AI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 위에서 힘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스테이블코인은 이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는 단순한 디지털 자산이 아니라 달러 패권의 연장선이자 새로운 결제 질서의 실험장이며, 가속화되는 AI 시대 화폐의 원형일 수 있다. 투데이신문은 총 5편의 기획을 통해 통화의 미래를 둘러싼 변화의 흐름을 짚고 그 변화가 금융과 산업, 국가 경쟁력에 던지는 질문을 살펴본다.
【투데이신문 문영서·최예진 기자】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시장 잠식으로 통화 주권 위축과 국부 유출 우려가 커지며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이 시급한 과제로 부상했다. 글로벌 격차 해소를 위한 신속한 입법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발행 주체에 대한 민간 허용을 두고 당국과 업계간의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29일 한국은행 금융안정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국내 시장에서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거래 규모는 하루 평균 5700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직전분기(4400억원)보다 29.55%(1300억원) 크게 늘어난 수준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은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통화 주권 수호와 국부 유출 방지를 위한 핵심 과제다. 현재 국내외 거래에서 USDC·USDT 등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400조원 규모로 유통되며 한국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부재한 상황에서 환율 변동이 발생하면 국내 결제 및 송금 비용이 급증하고, 자본이 해외로 빠져나가 경제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
경제적 효율성 제고와 디지털 금융 인프라 강화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이러한 위험을 차단하고 국내 금융 생태계를 강화할 필수 인프라다. 실물 경제 연동 결제 수수료를 1%대에서 0.1%대로 낮춰 중소기업과 개인의 송금 효율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블록체인 기반의 실시간 국경 간 거래로 K-콘텐츠·이커머스(e-commerce) 수출 경쟁력을 강화한다. 특히 가계부채 1900조원 시대에 저비용 디지털 원화는 가계 자산 보호와 금융 포용성을 확대할 전망이다.
한편 한국은행은 ‘프로젝트 한강’ 2단계에 착수해 도매형 CBDC와 예금토큰을 확대 테스트 중이다. 9개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IBK기업·BNK 부산·경남·아이엠) 참여로 개인간(P2P) 해외송금·생체인증·자동 전환 기능을 도입하고, 전기차(EV) 충전 보조금·국고 지급 등 실생활 활용을 시험한다. 이는 공공 인프라로 저비용 결제 레일을 구축하는 움직임으로, 민간 원화 스테이블코인과 상호보완될 전망이다.
반면 CBDC는 거래 데이터가 중앙은행에 집중될 수 있어 사생활 침해 우려가 크다. 중국 e-CNY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감내가 가능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에서는 감시 리스크가 높아 프라이버시 방파제가 필수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PoR·분산 발행으로 이를 보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한국의 제도 정비는 여전히 한계에 부딪혀 있다. 지난해 7월 시행된 가상자산법은 스테이블코인을 ‘고정가치형 디지털자산’으로 분류해 발행사 등록, 50억원 자본금, 준비금 1대 1 적립, 금융위 인가를 의무화했다. 하지만 가상자산 2단계 법안(디지털자산기본법)은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 간의 이견으로 연내 제출조차 지연되고 있다. 은행 독점 발행 여부와 민간 허용에 대한 논쟁, 거래소 지분 규제 강화 등으로 인해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실증 작업이 해외 스테이블코인에 밀리는 모양새다.
가천대 경영학과 전성민 교수는 “한국은행 중심 발행 모델은 금융 안정성을 도모하나, 기술 기업의 혁신을 저해하고 글로벌 트렌드와 배치된다”며 “미국, 유럽 등 주요국은 발행 주체의 신분보다 준비 자산의 건전성이라는 기능에 초점을 맞추는 추세”라고 짚었다.
이어 “폐쇄적 모델을 고수하면 국내 이용자가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종속될 위험이 크므로, 기술 기업 참여가 가능한 다중 발행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실제 해외와 비교하면 격차는 더 뚜렷하다. 싱가포르 통화청(MAS) 규제 하에 주요 10개국(G10) 통화 연동 스테이블코인 124개 파트너를 구축하며 글로벌 허브로 부상했고, 홍콩은 금융관리국(HKMA) 주도로 자국 코인을 발행해 100개 생태계를 완성했다. 일본은 2023년 은행 전속 모델로 75개 인프라를 법제화하며 ‘아날로그’ 이미지를 탈피했다. 반면 한국은 63개 파트너에 그치고 있으며, 규제 불확실성과 준비금 관리 기준 미비, 복잡한 인가 절차로 인해 민간 주도 인프라 구축이 더딘 실정이다.
이뿐만 아니라 정책금융과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협업할 경우 실시간 소비 데이터 분석을 통해 소상공인에게 즉각적인 사업 판단 근거를 제공하며 관련 시장을 빠르게 키울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아크포인트 오태완 대표는 “우리나라는 이미 재난지원금, 소비 쿠폰, 지역 화폐 발행 규모가 상당한데, 현재의 종이형·카드형 지역 화폐는 자금이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실시간 인사이트를 얻기 어렵다”며 “데이터 분석까지 긴 시간이 소요돼 소상공인이 즉각적인 사업 판단을 내리기 힘든데 이를 프로그래머블 화폐인 스테이블코인으로 발행하면 어떤 시장에서 붕어빵이 많이 팔리는지, 어느 연령대가 언제 소비하는지 실시간 데이터가 제공된다”고 분석했다.
이어 “스타트업들은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다양한 알고리즘을 내놓을 것이고, 상인들은 공백 시장을 찾아 창의적인 비즈니스를 펼칠 수 있다”며 “지역 화폐나 소비 쿠폰을 스테이블코인 형태로 단 한 번만 발행해도 한국은 단숨에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 3위에 등극하며 디지털 금융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달러 의존 위험성과 민간 주도의 실증 가속화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의존 확대는 치명적 위험을 내포한다. 통화 수요 감소로 원화 가치 하락과 환율 상승이 동반될 수 있으며, 글로벌 위기 시 33조달러 규모의 스테이블코인이 일시에 유출돼 새로운 금융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 테라·루나 사태처럼 준비금이 미달할 경우, 국내 유통 자금이 증발하며 금융 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경영대학 류혁선 교수는 “현재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99% 이상은 미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차지하고 있다. 이는 디지털 금융 인프라 자체가 달러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구조가 고착될 경우 한국 디지털 경제에서는 결제·정산 통화의 선택권이 약화될 수 있고, 온체인 기반 서비스에서 원화의 네트워크 효과가 제한될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규제 밖 해외 스테이블코인 의존도가 높아지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공백 속에서 민간 기업들의 선도적인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하나금융지주는 USDC 보유 외국인을 대상으로 결제 시 캐시백을 주는 마케팅을 전개하며 실사용을 테스트하고 있다. 다날은 바이낸스페이·써클과 협력해 오는 4월 외국인 디지털자산 결제 시스템을 런칭할 계획이며, 두나무(업비트)는 네이버페이와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 협력 및 자체 블록체인 ‘기와’로 인프라를 구축 중이다.
쿠팡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시 연간 수천억원대의 카드 수수료를 절감할 수 있다고 판단해 법률 검토를 본격화했다. 글로벌 기업 또한 가세하고 있다. 마스터카드와 비자는 스테이블코인 결제 네트워크를 상용화하며 한국 시장 진출을 모색 중이고, 페이팔은 USD(PYUSD) 기반의 개발자 발행 플랫폼을 출시해 확대를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민간 실증은 제도 정비를 가속화할 촉매가 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시장 친화적 대안과 정책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전 교수는 “기업공개(IPO)를 통한 자율적 소유 분산과 투명성 확보, 실시간 준비금 증명(PoR) 등 기술 기반 신뢰 인프라 구축이 실질적 해법”이라며 “1은행-1거래소 등 그림자 규제를 철폐해 시장 경쟁을 촉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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