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처음으로 일본 문화재 반환 이뤄진 역사적 순간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해방 이후 처음으로 일본 문화재 반환 이뤄진 역사적 순간

프레시안 2026-03-28 18:35:47 신고

지금까지 제1부에서 한일회담에서 논의된 문화재 반환 문제의 교섭 과정, 제2부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고려자기, 오구라 다케노스케와 오구라 컬렉션에 관한 이야기를 풀었다. 앞으로 연재 예정인 제2부의 주제들이 더 있는데, 이는 잠시 쉬고 제1부에서 다루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이번 주부터 몇 차례 <번외편>으로 다룰 예정이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제4차 한일회담 개최 다음날인 1958년 4월 16일, 일본 측이 한국 측에 인도한 106점의 문화재에 관한 것이다. 이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문화재 인도였다. 106점의 문화재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는지 살펴보자.

한국 측의 문화재 반환 교섭 방침

한일 양국은 1958년 1월부터 실무위원회를 개최한다. 구두전달사항을 비롯한 1957년 12월 31일의 합의사항을 이행하고 제4차 한일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한국정부는 이를 위한 교섭 방침을 작성하여 주일대표부에 전달한다. 그중 문화재 반환 문제와 관련한 주요 지침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한국정부는 1월 10일 방침에서 문화재 반환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정부가 반환할 한국예술품 목록을 1958년 2월 1일까지 확보할 것', '그 범위는 일본정부가 소유한 모든 예술품일 것', '제1차 반환 기한은 2월 말까지이며, 잔여분은 전면회담에서 논의할 것', '대일청구권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먼저 논의할 것' 등을 주문했다.

이와 함께 1월 16일에는 '일본에게 피탈된 예술품 목록에 관한 건'이라는 방침과 함께 '피탈 미술품 목록 기1'을 보냈다. 이 목록은 외교문서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피탈문화재 중 일부의 설명서'라는 문서가 이 목록의 일부로 추정된다.

▲ 피탈문화재 중 일부의 설명서. ⓒ 한일회담 관련 한국외교문서

이 설명서는 '양산부부총', '낙랑 왕우묘 발굴품', '경주 석굴암 대리석 사리탑 1기와 감불 2기', '오대산 사고 소장 조선왕조 한질', '고려자기 약 120점', '오구라 다케노스케 소장품'에 대한 반출 경위와 소재지를 설명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문화재를 일부 인도하고 그 외 문화재는 전면회담에서 토의한다'는 구두전달사항을 바탕으로(칼럼 제1부 ④ 참조) 이와 같이 일부 문화재들을 돌려받고, 양산부부총 등을 비롯한 여러 문화재들은 제4차 한일회담 개최 후 논의하여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실무위원회 논의

이상과 같은 지침을 바탕으로 한국 측은 제1차 실무위원회(1월 7일)와 제2차 실무위원회(1월 14일)에서 일본 측에 반환 가능한 문화재 목록 제출을 요청했다. 일본 측은 제4차 실무위원회(1월 27일)에서 97점의 목록을 제출했는데, 이는 당시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던 창녕군 교동 31호 고분 출토품이었다. 이 유물은 발굴 이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관되다가 1938년 9월 5일에 도쿄국립박물관의 전신에 해당하는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에 기증된 경위가 있었다. 그리고 제2차 한일회담 당시 한국 측이 제출했던 '일본 소재 한국 국보 미술공예품 목록'(칼럼 제1부 ② 참조) 중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유물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한국 측은 해당 목록에 '증여'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을 '반환'으로 수정하도록 요청했지만, 일본 측은 그대로 놔두고 싶지만 구체적으로 논의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에 '인도'로 할 것을 제안했고 한국 측도 이를 받아들였다. 일본 측은 그 자리에서 '증여'를 '인도'로 수정했다.

▲ 일본 측이 제출한 97점의 문화재 목록. ⓒ 한일회담 관련 일본외교문서

한국 측은 제5차 실무위원회(1월 28일)에서 일본정부가 소유한 모든 한국예술품이 담긴 목록을 2월 14일까지 제출해 줄 것을 일본 측에 요청했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한국 측 요청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상급 기관에 보고하겠다고 답변했다.

제8차 실무위원회(2월 12일)아 제9차 실무위원회(2월 24일)에서도 한국 측은 일본 측에 일본정부가 소유한 모든 한국예술품이 담긴 목록을 제출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한국예술품 97점을 즉시 인도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이는 만족한다고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정부는 97점의 문화재에 대해 만족하지 않았다. 당시 외교부는 97점의 문화재 목록을 받은 후 문교부에 이에 대한 가치를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한 외교문서가 없기 때문에 문교부의 검토 결과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한국정부가 당시 재외 공관에 보낸 한일회담 관련 공문에서 "1958년 1월 28일에 일본 측은 자기들이 즉시 반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는 97점의 한국 예술품 '리스트'를 우리에게 수교했으나 동 '리스트'는 아측에 만족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므로 ···중략··· 일본 측에 대하여 반환 예술품 전부를 포함한 완전한 '리스트'를 제출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보고한 것을 보면 97점의 문화재에 대해 만족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주일대표부는 일본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한국예술품이 포함된 목록을 일본 측에 계속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9회 실무위원회를 끝으로 양국의 논의가 끝났기 때문에 한국 측은 2월 중에 97점의 문화재를 돌려받지 못했고, 이와 함께 계속 요구했던 또 다른 문화재 목록도 받을 수 없었다.

106점의 문화재 인도

이후 일본 측은 4월 16일 16시에 106점의 문화재를 주일대표부에 인도한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97점의 문화재인데, 그 개수를 정정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439점의 문화재 목록도 제출하는데, 이는 양산부부총 출토 유물이었다. 이는 한국 측이 반환해 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한 유물이다.

일본 측이 한국 측에 106점의 문화재를 인도하는 내용은 한국외교문서에는 없고 일본외교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일본 측은 25개의 나무상자에 106점의 문화재를 넣고 작은 트럭에 실어 주일대표부로 가져온 후 이를 2층 응접실에서 전달하면서 그 가치와 일본 도래 경위를 설명한다. 황수영 전문위원은 한국에서 가져온 다른 목록을 보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일본 측의 답변을 들은 후 대표적인 유물이 든 네 상자의 뚜껑을 열어 확인 작업을 했다. 황수영 전문위원이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자 일본 측도 도쿄국립박물관에 전화를 걸어 인도가 무사히 끝났다고 전했다.

▲ 106점의 문화재 인도를 확인한 수령증. ⓒ 한일회담 관련 일본외교문서

잠시 후 진필식 서기관이 1층에서 올라와 모든 나무 상자를 열어 확인해 보고 싶다고 요청하여 106점의 문화재 목록과 확인 작업을 실시했다. 이때 유태하 공사가 응접실로 들어와 도자기 뚜껑을 보며 "이런 건 한국 야시장에 가면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말하고 금귀걸이를 보며 "도금한 것인가?"라고 묻기도 했다. 이에 일본 측은 순금이라고 답했고, 유진오 공사는 손 위에 금귀걸이를 올려놓고 무게를 제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필식 서기관은 일본어로 작성된 수령증을 영어로 번역해서 제시했고, 일본 측도 문구의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받았다. 약 2시간에 걸친 이와 같은 확인 작업과 수령증 교환이 모두 종료되었다.

이와 같이 106점의 문화재 인도가 마무리되었다. 일본외교문서에는 이후 일본 측이 주일대표부를 떠날 때의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이 일본 측의 당시 심정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장면이다.

(106점의 문화재 인도는: 필자 주) 대체로 두 시간이 걸렸고, 본건 수령은 비교적 좋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지만, 본 미술품의 증여에 대해 한국 측으로부터 감사의 말은 끝까지 듣지 못했다. 또한 한국 측은 돌아가는 길에 차를 제공했는데, 현관에서 배웅하면서 진 사무관은 야지마(矢島) 과장에게 더 좋은 미술품을 많이 받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외교 문서, <문화재 인도에 관한 건>, No.1118.)

일본 측의 서운함(?)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문화재보호위원회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측에 106점의 문화재를 인도했는데, 고맙다는 말도 없이 '다음에는 더 좋은 걸 받고 싶다'고 말했으니 일본 측 입장에서는 한국 측이 얄미웠을 것이다. 이와 함께 유태하 공사는 도자기 뚜껑을 보고 '한국 야시장에 가면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일본외교문서에서 '함부로 말하다' 또는 '막말'이라는 뜻의 '放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106점의 문화재를 인도한 일본 측의 입장에서는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 측이 서운함을 느꼈겠지만,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1958년 4월 15일에 106점의 문화재가 한국 측에 인도되었다. 이는 해방 이후 처음, 그리고 한일회담에서도 처음으로 문화재 인도가 이루어진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 참고문헌

한일회담 관련 한국정부 외교문서

엄태봉,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문제의 구조'>, 경인문화사, 2024.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광고 보고 계속 읽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