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락] 대한민국 경제의 심장 역할을 해온 지방 산업단지가 '공동화(空洞化)' 위기에 직면했다.
중국발 저가 물량 공세와 글로벌 공급 과잉이 맞물리면서 철강, 조선, 석유화학 등 주요 기반 산업의 수익성이 지속적으로 악화하는 추세다.
수익성 한계에 직면한 기업들은 기존의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 대규모 통폐합과 사업재편을 통해 위기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대기업 중심의 설비 감축과 구조조정은 지역 하청업체의 일자리 감소와 상권 침체를 동반하며 연쇄적인 지역 경제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뉴스락>뉴스락>은 지방 산단의 공동화 실태를 진단하고, 지역 경제의 생존 전략을 조명한다.
멈춰선 공장, 떠나는 인력...벼랑 끝 지역 굴뚝산업
공장이 멈추고, 사람이 떠나고, 상가에 불이 꺼졌다.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부였던 여수·광양·거제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
중국의 저가 공세와 글로벌 공급 과잉, 여기에 중동 사태에 따른 원료 수급난까지 겹치면서 비수도권 거점 산업단지에서는 공장이 문을 닫고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국내 최대 석유화학 거점인 전남 여수가 가장 먼저 흔들렸다. 중국은 2025년까지 에틸렌 생산능력을 6,000만 톤, 2027년에는 7,200만 톤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 아래 대규모 증설을 이어왔다.
자급률 100% 달성 후 순수출국으로 전환이 유력시되면서, 2030년에는 한국의 대중(對中) 수출 물량이 2024년 대비 62% 감소한 600만 톤에 그칠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온 상태다.
공급 과잉이 구조화된 상황에서 중동 이란 전쟁으로 인한 나프타(납사) 수급 차질이 이중 악재로 터졌다.
여천NCC는 2022년 3,477억 원, 2023년 2,402억 원, 2024년 2,360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하며 3년간 약 8,239억 원의 적자를 쌓았다. 결국 2024년 말 3공장 가동을 멈춘 데 이어 2공장 폐쇄까지 검토하고 있다.
LG화학도 지난 23일 연산 80만 톤 규모의 여수 NCC 2공장 가동을 전격 중단했다. 해당 공장의 연간 매출은 2조4,885억 원으로, LG화학 전체 매출의 5.09%에 달한다.
후방 파급력이 큰 1공장(120만 톤)은 기존 재고로 버티고 있으나, 원료 수급난이 장기화될 경우 4월 중순부터는 석유화학 소재를 활용하는 산업계 전반으로 가동 중단이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장에서 나오고 있다.
철강업계 역시 내수 건설 경기 침체와 중국산 철강재 유입 확대로 수익성 둔화를 겪고 있다.
포스코그룹의 철강 부문 매출은 2023년 63조 5,390억 원에서 2025년 59조 4,110억 원으로 3년 연속 감소했다.
현대제철은 철근 수요 급감에 대응하기 위해 올해 1월부터 연산 80만 톤 규모의 인천공장 내 전기로 제강 및 소형 압연 설비 가동을 중단했으며, 현재 노사협의회를 통해 해당 라인의 폐쇄 및 인력 전환 배치 절차를 논의하고 있다.
동국제강 또한 재고 조정과 원가 부담 완화를 위해 지난해 7월부터 8월까지 약 한 달간 핵심 생산 거점인 인천공장의 제강 및 압연 라인 생산을 중단한 바 있다.
조선산업은 겉으로는 호황이다. HD한국조선해양,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 등 대형 조선소는 3년치 이상의 수주 잔량을 확보하며 외형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거제 지역 경기는 정반대다. 2015년 조선업 불황 이후 내국인 숙련공들이 타 지역·타 업종으로 대거 이탈하면서 현재 거제 조선소 노동자의 약 15%가 외국인으로 채워진 상태다.
임금 상당 부분이 본국으로 송금되는 구조 탓에 지역 소비로 환류되지 않고, 2025년 4분기 기준 거제 옥포 지역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35.1%로 전국 평균(13.8%)의 2.5배를 웃돈다.
산업 침체는 지역 일자리 직접 감소로 이어졌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석유화학·디스플레이·철강 부문 비수도권 대기업 10곳에서만 2022년부터 2025년 상반기까지 총 6,185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하청·협력 구조를 감안하면 실제 감소 규모는 이를 크게 웃돈다. 산업 침체가 인구 유출을 부르고, 인구 감소가 다시 지역 재정과 소비 기반을 잠식하는 악순환이 이들 지역에서 깊어지고 있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현재의 과잉공급 상황을 "서로 눈치만 보느라 누구도 먼저 나서지 못하는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라며 "정부가 소극적 사후 승인 방식에서 벗어나 선제적으로 사업재편 대상을 발굴하는 능동적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적과의 동침' 택한 석화·철강...3대 산단 사업재편 본격화
철강·석유화학 업계가 글로벌 공급 과잉과 수익성 악화라는 파고를 넘기 위해 대규모 통폐합의 닻을 올렸다.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에서 선제적인 구조조정의 신호탄이 올랐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 3월 20일 여천NCC,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DL케미칼 등 4개사가 참여하는 '여수 1호 프로젝트'의 사업재편계획서 최종안이 제출됐다.
공정거래위원회 역시 같은 날 롯데케미칼과 여천NCC 간 기업결합 사전심사에 착수했다. 심사와 결합 절차가 마무리되면, 롯데케미칼과 한화솔루션, DL케미칼이 여천NCC의 지분을 각각 3분의 1씩 나누어 갖는 3자 공동지배 체제로 전환된다.
이번 여수 산단의 통폐합은 앞서 충남 대산 산단에서 시작된 구조조정의 연장선에 있다. 지난 2월 롯데케미칼과 HD현대케미칼, HD현대오일뱅크의 통폐합을 골자로 한 '대산 1호 프로젝트'가 정부의 최종 승인을 받으며 석유화학 업계 사업재편의 포문을 열었다.
업계는 여수와 대산에 이어 울산까지 국내 3대 석유화학 거점 산단 전체로 통폐합과 설비 감축 논의가 확산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대규모 결합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은 상황이다. LG화학과 GS칼텍스가 추진 중인 '여수 2호' 합작사 설립은 까다로운 법적 규제와 이해관계에 가로막혀 있다.
GS칼텍스는 지주사인 ㈜GS의 손자회사로, 현행 공정거래법상 국내 계열사 주식 보유가 제한돼 합작법인 설립 요건을 충족하기 어렵다.
또한 GS칼텍스 지분 절반을 보유한 미국 셰브런의 동의 절차와 양사 간 자산 가치 산정을 둘러싼 시각차까지 겹치며 협상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석유화학 업계가 공동으로 내세웠던 에틸렌 연산 370만 톤 자율 감축 목표 역시 기업별 셈법이 엇갈리며 달성이 불투명해졌다.
철강업계의 사업재편은 정부 정책을 동력 삼아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K-스틸법(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특별법)'이 오는 5월 본격적인 시행을 앞두고 있다.
해당 법안이 발효되면 범용 철근과 형강 부문을 중심으로 한 설비 감축이 명확한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급물살을 타게 된다.
정부는 굴뚝 산업의 구조조정이 지역 경제에 미칠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지원책을 함께 가동한다.
대규모 설비 감축에 따른 하청업체와 상권의 연쇄 침체를 막기 위해, 산업위기지역 전용 지원 예산을 지난해 추경 기준 52억 원에서 올해 본예산 247억 원으로 5배가량 확대 편성했다.
마강래 중앙대학교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뉴스락> 과의 통화에서 뉴스락>"디지털 전환, 에너지 전환,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동시에 진행되며 산업구조 자체가 바뀌는 국면"이라며 "이는 철도 도입기 산업혁명에 비견될 만큼 산업 입지와 경쟁 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변화"라고 말했다.
이어 "산단 축소는 협력업체 축소와 지역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며 연쇄적인 공동화를 유발한다"며 "개별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경제와 사회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구조적 리스크로 확대되고 있으며, 이 흐름은 중장기적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수조원 투입에도 겉도는 메가 프로젝트...지방 산단 소멸 막을까
지방 산업단지의 시계가 멈춰가고 있다. 공장 불빛이 꺼지고 청년이 빠져나가는 위기의 속도는 가파르지만, 이를 막기 위한 정책의 발걸음은 여전히 현장에 닿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는 수조 원대 예산 투입과 '행정 광역화'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전남도는 올해 초 '석유화학·철강 산업 대전환 원년'을 선포하고 총 4조 6000억 원 규모의 메가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핵심 전략은 ▲친환경·탄소중립 대전환 ▲고부가·인공지능(AI) 기반 산업 고도화 ▲재생에너지 기반 산업단지(산단) 조성이다.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원 예산으로 2025년 473억 원, 2026년 1,530억 원을 포함해 2030년까지 총 7,102억 원이 투입된다.
그러나 공동화는 이미 상당히 진행됐다. 행정안전부가 지정한 전국 인구감소지역 89곳 중 85곳(95.5%)이 비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설비 전환과 산단 고도화가 실물 효과를 내기까지의 시간 동안, 지역 인구와 소비 기반은 계속 줄어드는 구조다.
마강래 중앙대학교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뉴스락> 과의 통화에서 "문제의 본질은 단순한 일자리 감소가 아니라 지역 산업생태계 자체가 약화된 데 있다"고 진단했다. 뉴스락>
수도권은 신산업 중심으로 새로운 일자리 창출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지만, 지역은 이를 대체할 생태계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마 교수는 "이제는 인재가 기업을 끌어들이는 구조로 전환됐다"며 "외부 앵커기업을 유치하는 방식은 더 이상 효과적인 해법이 되기 어렵다. 지역 내부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그 인재를 기반으로 기업이 성장하는 내생적 성장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비수도권 산단 중심 도시들의 행정구역 광역화 논의가 정치권 의제로 부상했다.
구미·창원·광양 등을 통합해 규제 완화와 예산 집행 효율을 높이자는 구상으로, 단독 행정구역으로는 인구·세수 감소의 악순환을 끊기 어렵다는 지자체들의 판단이 배경에 깔려 있다.
다만 논의는 초기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방선거 국면에서 의제로 부상했을 뿐, 구체적인 실행 로드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마 교수는 메가 프로젝트와 광역화에 대해 "방향 자체는 타당하지만 수단이 목적화되는 한계가 있다"고 짚었다.
그는 "광역화의 본질은 행정 통합이 아니라 지역 산업생태계 구축을 위한 공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기업·대학·연구소가 결합된 혁신 클러스터와 공공행정 기능이 함께 작동할 때 실질적인 성장 동력이 만들어진다. 현재 정책은 이러한 구조적 연결 없이 추진되다 보니 현장 체감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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