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혜원 작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인문계 학생이었다. 학기 초에 모의고사를 봤는데, 성적표가 배포되는 날에 맞춰 입시 자료가 칠판 옆에 게시됐다. 모의고사 점수로 어디에 진학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라는 뜻이었을 텐데, 그것을 본 순간 든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인문계니까 문과 중에서 골라 가야 할 텐데, 딱히 가고 싶은 과가 없구나.’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국문학과가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별로 끌리지 않았다. 한국인이 한국어를 배우면 왠지 취직이 어려울 것 같았다. 미술쯤은 돼야 재미가 있고 앞날도 밝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멋대로 진로를 바꿔 버렸다.
일 년간 입시 미술을 배워 한 곳에 합격했다. 당시 경쟁률이 학교마다 십수 대 일, 수십 대 일이라 반쯤 포기 상태였다. 지망한 세 학교를 다 떨어지면 아무 전문 대학의 아무 미술 학과에나 들어갈 작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원하던 곳에서 미술을 배울 수 있게 돼 다행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막상 배워 보니 미술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순수미술 중심의 서양화과에 들어갔기 때문에 전공 시간에는 무조건 유화를 그려야 했다. 미술 사조나 특정 주제에 따라 매 시간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화풍이나 주제가 주어져도 솔직히 뭘 그려야 할지 모를 때가 많았다. 표현하고 싶은 게 없지는 않았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 몰랐던 것 같다. 마음의 소리를 뾰족하게 캐치하지 못했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자꾸 모호한 추상화만 그려졌다. 모든 것이 흐릿하던 시절이었다. 정말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둥 마는 둥하며 학교를 다녔다. 3학년이 되기 직전까지도 미술에 별로 흥미가 일지 않았다.
우연히 실기실 밖 복도에 붙은 포스터를 봤다. 미술심리치료사 자격증 취득 과정을 안내하는 광고였다. 미대를 졸업한 후 미술 치료사가 된다는 게 꽤 납득이 가고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보였다. 어떤 기관의 어떤 자격증을 딸 수 있는 수업인지 따져 보지도 않고 무작정 수강 신청을 했다.
그룹으로 다양한 미술 진단 기법을 배우며 서로의 심리를 살펴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집, 사람, 나무를 그리고 풍경을 그렸다. 어지럽게 그어진 선 안에서 형상을 찾아 색을 칠하기도 했다. 그 후 각자가 그린 그림을 놓고 어떤 마음으로 그렸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했다. 그런 경험이 있어야만 미술 치료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내 그림은 수업에서 자주 주목을 받았다. 잘 그려서가 아니었다. 부정적인 심리를 드러내는 ‘모범 사례’라고 했다. 일부러 그렇게 그린 게 아니었는데, 그냥 되는 대로 끄적인 것이었는데, 칠판에 내걸려 관심을 받자니 어딘지 창피하고 쑥스러웠다. 그림 속 요소 몇 개로 인간의 심리를 판단한다는 것이 억지 논리나 과대 해석 같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두의 관심이 싫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통해 나를 읽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던진 소리 없는 메시지가 남들에게 가닿았을 때 비로소 미술을 좋아하게 됐다.
속에 담아 둔 이야기가 참 많았음을 깨달았다. 한번 꺼내고 나니 앞으로도 계속 꺼내고 싶어졌다. 그때만 해도 나는 타인의 마음을 돌볼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미술 치료사가 되는 일은 금방 포기해 버렸다. 그 대신 미술에 흥미가 생겼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뾰족하게 캐치해서 작품으로 뾰족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욕망에 불이 붙었다. 그 욕망이 나를 작업자의 길로 이끌었다.
나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다. 존재감도 희미하다. 어디에 갖다 놔도 묻혀 버린다. 미술 작품이라는 매개체가 없었다면 찍소리도 못 내고 복잡한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진즉에 찌그러져 버렸을 것이다.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글도 못 쓴 채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을 때, 미술은 내게 깃들어 대체 언어가 돼 주었다. 아직도 못다 한 말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미련이 철철 넘치는 마음으로 계속 미술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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