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약·화학 기업 머크가 대전에 4300억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면서 350년 역사를 이어온 '머크 가문'이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단행된 이번 투자는 단순한 생산기지 확대를 넘어 장기 경영전략에 기반한 결정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오너일가가 직접 경영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안정적인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 구조가 이러한 대규모 투자 판단의 배경으로 지목되면서 머크 가문의 지배구조와 혈통 중심 경영 방식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대다수 오너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와 단기 실적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머크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전제로 장기 성장 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해 온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특히 가문이 지배력을 유지하면서도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는 구조는 글로벌 경쟁 환경 속에서 안정성과 혁신을 동시에 확보하는 모델로 평가받는다. 이번 대전 투자 역시 이러한 지배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소유는 가문, 경영은 전문가…350년 기업 만든 머크식 지배구조
머크의 지배구조는 단순한 가족기업을 넘어 '제도화된 소유 구조'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 머크는 독일 특유의 합자주식회사(KGaA) 형태로 운영되며 가족 지주회사인 이머크가 약 70%의 지분을 보유해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나머지 약 30%는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에 상장돼 투자자들이 참여하는 구조다. 외부자본을 유치하면서도 경영권이 흔들리지 않도록 설계돼 적대적 인수합병이나 행동주의 펀드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점이 특징이다.
머크 지배구조의 핵심은 가문이 '경영권'을 쥐고 있으면서도 '경영 활동'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머크 가문은 기업을 사적 재산이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해 보존해야 할 자산'으로 규정하고 있다. 머크 가문의 가족 헌장에 따르면 가문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오너가 아닌 '관리자(steward)'로 인식하고 있다. 내부규범을 통해 제도화된 것이다.
실질적인 기업 운영은 최고경영자(CEO)를 중심으로 한 전문경영인 조직이 맡는다. 현재 머크를 이끄는 벨렌 가리호 CEO는 독일 DAX 상장사 최초의 여성 단독 CEO로 능력중심 인사 원칙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가문은 '파트너 이사회'를 통해 장기 전략과 방향성을 설정하고 대규모 투자나 주요 의사결정에 대해서만 승인 권한을 행사한다. 일상적인 경영 판단과 실행은 전적으로 전문경영인에게 위임된다.
소유와 경영이 철저하게 분리된 지배구조는 머크의 가장 큰 경쟁력으로 꼽힌다. 단기 실적에 흔들리지 않고 장기 투자와 전략적 의사결정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실제 머크는 2000년대 이후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며 성장해왔다. 2006년 세로노 인수를 시작으로 2010년 밀리포어, 2019년 버슘 머티리얼즈 등을 잇따라 인수하며 생명과학과 반도체 소재 분야를 핵심 사업으로 키웠다.
이러한 전략은 단기 수익성보다는 산업 구조 변화에 대응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머크의 매출 구조를 보면 생명과학과 아시아 시장 비중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이번 대전 투자 역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는 상황에서 생산 거점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려는 전략적 판단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머크의 지배구조를 책임 있는 소유와 전문경영의 결합으로 평가하고 있다. 가문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도 실행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이를 통해 기업의 안정성과 성장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구조라는 분석이다.
13세대 이어진 '확장형 가계도'…권력 분산으로 지배력 지켜낸 머크 가문
머크 가문의 또 다른 특징은 체계적으로 관리된 가계 구조다. 머크는 1668년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약사였던 프리드리히 야코프 머크가 '천사약국'을 인수하면서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 약 358년, 13세대에 걸쳐 가업이 이어지고 있다. 단순한 장수 가문을 넘어 혈통과 지배구조를 결합해 기업 통제력을 유지해온 대표적 사례로 지목된다.
현재 머크 가문은 약 130여 명의 구성원이 참여하는 대규모 가족 집단으로 이들은 모두 지주회사 E. Merck KG의 파트너로서 지분을 공동 보유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이들이 단순한 주주가 아니라 일정한 규율과 기준에 따라 관리되는 '조직화된 가족 구성원'이라는 점이다. 가문에 속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지분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헌장에 따른 자격 요건과 책임을 충족해야 한다.
또 다른 머크 가계도의 특징은 특정 인물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는 '분산형 구조'다. 일반적인 재벌가처럼 1인 중심의 지분 승계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분가로 나뉜 구성원들이 지분을 공유하며 집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 이로 인해 내부 권력 다툼이나 경영권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평가다.
실제 머크 가문은 세대를 거쳐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제한해왔다. 11세대인 프랑크 슈탕겐베르크 하버캄프, 12세대인 요하네스 바일루 등 주요 가문 인사들은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에는 참여했지만 최고경영자(CEO)로 직접 경영에 나선 사례는 없다. '가문은 통제하고, 경영은 전문가가 맡는다'는 원칙이 혈통을 넘어 제도화됐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가계 구조는 역사적 경험과도 맞닿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사업이 몰수되며 기업이 분리된 사건은 머크 가문에 지배구조 안정성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이후 가문은 지분을 분산시키되 통제력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구조를 재편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머크 가문은 '혈통' 자체보다 '혈통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초점을 맞춘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가문 구성원 전체가 기업의 장기 생존을 위한 공동 책임을 지는 구조를 만들고 이를 통해 세대를 넘어 지배력을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이에 머크의 경우 가족기업의 가장 진화된 형태 중 하나라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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