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글로벌 반도체 경쟁이 ‘초격차’를 향한 속도전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산업 내부에서는 전혀 다른 균열이 감지되고 있다. 기술과 투자 경쟁에서는 앞서가고 있지만, 생산 현장에서는 산업재해와 직업성 질환 문제가 누적되며 구조적 리스크로 떠오르는 양상이다. 외부 경쟁력과 내부 지속가능성 간 간극이 벌어지며, 초격차 전략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9월 반도체 산업 산재 사망자는 12명으로, 이미 전년도 연간 수준을 넘어섰다. 이 가운데 80% 이상이 사고가 아닌 질병에 따른 사망으로 집계됐다. 화학물질 노출, 밀폐 공간 작업, 장시간 근무 등 공정 특성이 장기간 축적되며 건강 리스크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현장에서는 이런 위험이 기존 관리 체계로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작업환경 측정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정기적으로 시행되지만, 실제 공정별 작업 방식과 노출 수준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의견이다. 일부 측정은 특정 직군을 중심으로 이뤄지거나, 작업에 방해가 되는 장비를 현장에서 제거하는 사례도 있어 결과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반도체 공정 특성상 동일 공간에서도 직무에 따라 노출 강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장비를 운영하는 인력과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엔지니어 간 작업 범위와 위험 수준이 다름에도, 이를 세분화해 반영하는 측정 체계는 부족하다는 평가다. 현장에서는 유해 가스의 근원지를 직접 확인하는 과정에서 신체 이상을 호소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문제는 산업 구조와도 맞물려 있다. 반도체 산업은 다단계 협력 구조를 기반으로 운영되며, 위험 작업의 상당 부분이 외주화돼 있는 경우가 많다. 업무 범위가 넓고 작업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협력업체 인력이 실제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지만, 관리와 책임은 분산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내부 리스크가 단순한 산업재해를 넘어 ‘속도 경쟁’ 중심의 산업 구조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과 일본 등 주요 국가는 막대한 보조금과 인프라 지원을 앞세워 반도체 생산 경쟁력을 빠르게 끌어올리고 있다. 공장 부지 확보부터 전력·용수 공급, 인허가까지 국가가 전면 지원하는 방식으로 ‘속도’를 경쟁력의 핵심 변수로 삼고 있다.
반면 국내는 세액공제 중심 지원과 분절된 인허가 구조로 인해 속도 경쟁에서 제약받고 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역시 전력과 용수 확보 문제로 착공이 지연되며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 공장 가동 시점 자체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인프라 구축 지연은 곧 산업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노동 규제와 인력 수급 문제도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주52시간제 적용으로 연구개발 일정이 제약받는 가운데,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고연봉을 앞세워 국내 반도체 인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경쟁의 축이 설비와 기술에서 인재 확보로 확장되는 흐름 속에서, 국내 산업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초격차 경쟁을 둘러싼 환경은 기술과 투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단계에 진입했다는 분석이다. 생산 현장의 안전과 노동 환경, 정책과 인프라 체계가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않는 구조에서는 경쟁력 유지 자체가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결국 초격차 경쟁의 성패가 기술이 아니라 산업 기반의 안정성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생산 속도 경쟁과 안전 관리 체계를 분리해 설계하고, 공정과 직무 특성을 반영한 정밀한 작업환경 측정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아울러 전력·용수·인허가·노동 정책을 통합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대응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이어진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경쟁이 기술과 투자에서 공장 건설 속도, 인프라 확보, 인력 운영 체계까지 확장됐지만 국내는 여전히 각 요소가 분절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며 “전력·용수·인허가 같은 기반 인프라와 현장 안전 관리, 노동 규제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재설계하지 않으면 초격차를 유지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이어 “중앙정부 차원에서 일괄 관리하는 컨트롤타워를 구축하고, 연구개발 인력에 대한 근로시간 규제 유연화와 함께 공정·직무별 위험도를 반영한 작업환경 측정 및 예방 중심 안전관리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며 “세제 지원을 넘어 직접 투자·인프라·인력 정책이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로 바뀌지 않으면 경쟁 격차가 더 벌어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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