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정상 대좌 당시 분위기 전해…"두 정상이 솔직·진정성있는 대화"
美국무부 통역국장서 지난달 은퇴…워싱턴DC 컨설팅 회사서 인생 2막
(워싱턴=연합뉴스) 박성민 특파원 = "저는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정상회담을) 굉장히 잘 다뤘다, 잘 대처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첫 북미정상회담을 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의 통역관을 맡은 이연향 전 미국 국무부 통역국장은 회담장에서의 김 위원장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이 전 국장은 26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한국 특파원단과의 간담회에서 "(김 위원장이) 그렇게 많은 대외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던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관심이 있는 회담이었으니 정상들도 긴장하고 저도 긴장했다"며 "제 나름대로 (회담장) 분위기를 편안하고 긍정적이고 차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라고도 했다.
이 전 국장은 싱가포르 1차 회담뿐 아니라 2019년 2월 하노이 2차 회담, 같은 해 6월 판문점 3차 회담 등 3차례 북미정상회담에서 줄곧 트럼프 대통령의 통역을 맡았다.
그는 이들 회담의 분위기에 대해 "화기애애했다. 당시 두 분은 어떻게 해서든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과 의지가 있었던 것 같다. 진정하게 대화해보려고 노력하셨고, (두 정상 모두) 솔직하게 대화하는 분위기였다"라고 전했다.
3차례의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발언 빈도를 묻자 이 전 국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게 말이 많은 분은 아니다. (빈도는) 비슷했던 것 같다. 주고받은 느낌"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많이 듣기도 했다. 한쪽이 많이 했다는 그런 기억은 없다"고 말했다.
이 전 국장은 이어 "딜이 되고 안 되고는 또 다른 문제다. 두 분 만의 문제는 아니고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이라며 "각각의 회담마다 대외적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고, 또 핵에 관련된 것 등 두 분이 (그 자리에서) 결정할 수 없는 문제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전 국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줄곧 김 위원장과 매우 좋은 관계였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건 맞는 얘기"라고 말했다.
그는 "북미 대화를 통역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었다. 그 정상들이 만날 거라고는 사실 예상을 별로 못했기 때문"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니까 그런 발상의 전환을 해서 만난 것이지 갑작스럽게 하는 게 쉬운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전 국장은 김 위원장의 영어 실력에 대해선 "조금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한데 영어를 쓰는 건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 전 국장은 이화여대 통역대학원 교수를 지내던 2009년 국무부와 인연을 맺었고, 여성이자 미국에서 소수인 한국계로서 국무부 고위직인 국장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서울예고와 연세대 성악과를 졸업했으니 사실 통역사라는 직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중학생 시절 이란 주재 한국대사관 무관을 지낸 부친 이재우씨(2019년 작고)를 따라 이란에서 살면서 영어를 익혔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결혼해 가정을 꾸린 그는 친구의 권유로 한국외대 통번역 대학원에 진학한 뒤 통역사의 길을 걸었다.
이 전 국장은 "2009년 국무부에서 국제전화가 와서 '한국어 외교 통역사 정직원 자리가 처음 만들어졌는데 지원해달라'고 하더라. 약간 황당했다. 당시 내가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이고 통역계에선 굉장히 원로였는데도 '한국어 통역에 질적인 문제가 있어서 굉장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며 여러 번 전화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봉사와 사명감의 정신으로 결정을 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시험도 보고, 새로 통역사로 시작하는 걸 동료 교수들이 굉장히 의아하게 생각했다"면서 웃으며 국무부 통역사로 일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이 전 국장이 이란에 살았던 시기는 이슬람 혁명 전이었다. 그는 "혁명 이후 한 번도 못 가봤다. 이란만이 아니고 국무부에 있는 동안 국가들의 부침을 많이 봐왔다. 한 나라의 운명이 변하는 건 너무 놀라운 것"이라고도 했다.
정직원 70여명에 계약직 통역사 1천여명을 관리하는 통역국장 자리에 5년여 있었다는 이 전 국장은 지난달 말 16년 7개월의 국무부 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국무부에서 '닥터 리'(Dr. Lee)로 통한다는 그는 "굉장히 오래 있었다. 국무부에서 굉장히 성대한 은퇴식을 해줘서 감사하다. 트럼프 대통령도 감사장에 친필 서명을 해서 전달해주셨다"고 말했다.
이 전 국장은 지난 2013년 당시 조 바이든 미 부통령이 방한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It's never been a good bet to bet against America"라고 말하자 이를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 아니다"라고 통역한 이후 펼쳐진 상황을 통역사로서 난감했던 기억으로 꼽았다.
이 발언은 바이든 부통령이 한국과 중국이 밀착하는 것을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을 낳았는데, 이를 두고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미국식 구어(口語)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쪽에서 오해하거나 정확히 통역하지 않은 것 같다"고 이 전 국장의 통역을 탓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해 이 전 국장은 "깜짝 놀랐고, 화가 났다"면서도 "24시간이 지나고서 '이것도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덮었다"고 회상했다.
이 전 국장은 국무부에 소속된 직후부터 북미 회담의 통역을 많이 했다고 밝혔다.
그는 "분단의 역사 때문에 (한국과 북한의) 언어가 아주 다르지는 않지만, 확실히 다른 부분이 있다. 어떤 단어는 내가 못 이해해서 북한 쪽 영어 통역사 얘기를 들으면서 뜻을 이해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또 "사실 제 어머니가 평양에서 태어났고 외가가 다 평양 분들"이라며 "북미회담 통역은 내가 하고 싶었다. 백악관에서도 '닥터 리가 좀 해주면 좋겠다'는 요청도 많이 왔다. 북미 대화는 진짜 내가 하고 싶어서 했다"고 강조했다.
이 전 국장은 한국어로 통역하기 어려운 미국 대통령을 묻자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을 꼽았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은 변호사 출신이어서 문장이 법률 문서 같다. 문장 하나가 한 문단이다. 말을 하면서 공격받을 여지가 있다 싶으면 말을 이어 붙여서 아이디어를 완성한다"고 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다양한 생각을 많이 하고 생각의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어떤 얘기를 하다 갑자기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며 "그렇게 넘어가는 이유가 있고 연결고리는 분명히 있는데 그 연결고리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 전 국장은 자신이 바라본 한미관계에 대해선 "항상 굉장히 굳건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를 보면 굉장히 부침이 심한 언어도 많다. 그래서 미국이 어느 나라와 관계가 가까우면 통역 수요가 많아지고, 소원해지면 수요도 줄어든다"고 말했다.
국무부 통역국에는 한국어 통역사가 정직원 1명에 프리랜서 통역사 명단에 10∼15명이 있다고 이 전 국장은 전했다.
이 전 국장은 조만간 워싱턴DC의 한 컨설팅 회사에서 인생 2막을 열어갈 예정이라며 "여기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 재미있는 일이 있다면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min22@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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