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집 '그날의 초록빛' 펴내…맑은 시어로 생명윤리 모색
낡은 서정 탈피…성취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자기 갱신 의지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한국의 서정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일상의 맑고 투명한 시어로 자연의 숭고를 담아내며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해 온 김용택(78) 시인이다.
열일곱 번째 시집인 '그날의 초록빛'을 창비에서 펴낸 김용택을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 40여년 시력…농촌 현실·자연·생태 노래한 '섬진강 시인'
서정시를 이야기할 때 김용택을 빼놓을 수 없다면, 김용택을 이야기할 때 섬진강을 빼놓을 수 없다.
김용택은 1982년 '섬진강1' 외 시 여덟 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섬진강 연작은 그에게 '섬진강 시인'이란 별명을 안겼다.
그가 1985년 발표한 첫 시집 '섬진강'은 198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해체된 농촌의 삶과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 한국 문학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섬진강은 그의 문학적 시원(始原)이다.
실제 섬진강 자락이 흐르는 전북 임실군의 진메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교사와 시인을 겸하며 평생을 고향에서 보냈다. 농촌문제를 외면하지 않았고, 생태와 환경을 주제로 시문을 지어왔다.
2008년을 끝으로 38년간의 교사 생활을 마감한 그의 일상이 궁금했다.
그는 여전히 자연을 거닐며 시를 쓴다고 했다.
"아침 이슬이 잠들어 있을 때나, 초승달이 서산에 걸려 있을 때 주로 산책을 합니다. 자연 속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끝없는 일들이 생깁니다."
이어 시인은 "걸어야 보이고, 쭈그려 앉아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작은 곤충들과 풀잎의 모양들, 구름과 바람과 물결들…. 그 속에 있으면 무엇인가 쓰고 싶어서, 새로운 문장이나 단어가 끊임없이 생겨난다"며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 "집안일·새벽의 독서…시적 영감은 도처에 있어"
이번 시집 역시 자연에서 길어 올린 푸르고 싱싱한 시들로 가득하다.
"새로 돋았구나/ 이슬은 어디서 구해 왔니?// 저기 저 별이/ 울어주고 갔어요// 시인이/ 새벽에 물 길어 가요// 오래전 나였던/ 아가// 그 말이/ 그렇게/ 아름답구나" ('풀잎 아기' 전문)
"가을을 기다리면 가을이 온다/ 나는 주로 시를 기다린다"('나는 그 일이 그렇게 좋다' 중)는 시인은 기다림과 순응의 미학을 일깨운다.
그에게 시라는 것이 어떻게 마음에 수태되는지도 물었다.
"나는 시에 대해서 내 순정을 다 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시가 내게로 왔다"는 파블로 네루다의 말처럼, 어떤 문학적 성취가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다만 그는 "시가 오기까지, 내가 시에 다가가 시를 만날 때까지, 많은 일들을 하며 지낸다. 특히 아내가 지시해 놓은 집안일에 몰두한다"고 구수한 입담을 펼쳤다.
"빨래를 잘 널고 빨래를 잘 말려 거두어 개는 일은 시를 쓰는 일만큼이나 세심한 정성과 순서와 차례와 질서에서 오는 만족한 일의 기쁨을 줍니다."
시인은 "밥하고 설거지하는 일이 몸과 손에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져 간다"며 이렇게 되기까지는 아내의 숱한 질책과 지도가 있었다고 익살스럽게 덧붙였다.
어쩌면 이런 꾸밈 없는 소박한 일상이 그에게 부지불식간에 시로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새벽의 독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루틴이다.
시인은 "새벽의 독서 몰입은 나를 지워준다. 어떤 일을 하거나 책을 읽다가 눈을 떴을 때 말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며 "영감은 도처에서 저를 보고 눈을 흘긴다"라고 했다.
그는 "오래 보아 온 자연이, 많은 사람의 시나 사상이나 철학, 그림과 건축과 영화, 음악과 노래들이 나를 자극하고 그 일들이 또 다른 나의 말이 되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스스로 구축해온 서정의 틀 탈피…자기 갱신 의지도
여든을 바라보는 시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단정하다.
굳이 말을 비틀거나 감추지 않아도, 현란한 수사로 치장하지 않아도 그의 언어는 시가 된다.
그 맑음은 오랜 시간 삶을 통과하며 고운 체로 걸러낸 투명한 통찰에 가깝다.
그런 만큼 평이해 보이는 그의 시의 행간에는 삶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철학적 사유가 농축돼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이 스스로 구축해온 서정의 틀을 탈피하려는 의지도 보인다.
그는 "인간 혁명이 사라질 것 같은/ 공허한 인문과 '87 체제 문법'의 그 지루한 서정이/ 싫어졌어"('시적인 순간에서 사적인 순간으로' 중)라며 "나는 퀴퀴하게 낡은 나의 거울에서 나간다"('산책, 문장, 내 휴지통' 중)고 선언한다.
이는 과거의 성취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자기 갱신의 의지로도 읽힌다.
'87 체제 문법'의 의미를 묻자 시인은 "어느 특정한 연대나, 어느 나라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어느 시대, 어는 나라 어느 체제에서나 시대적 착오에서 나오는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사용할 때의 공허함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새 시집에서는 전통적 서정시와는 결이 다른 작품도 더러 눈에 띈다.
이를테면 '핵심의 전율'에서 그는 이렇게 일갈한다.
"전율에는/ 핵심이 없다/ 이런 젠장!/ 그 누구도/ 거기 가/ 닿지 못했다/ 다 죽었다"
시인은 이처럼 세계의 본질에 닿을 수 없는 인식의 한계를 정직하게 드러내지만,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되레 "이제, 인류의 질문과 대답이 인류에게 달라질 때가 되었다"('산책, 문장, 내 휴지통' 중)라며 풀잎과 이슬처럼 작고 연약한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명의 윤리를 모색한다.
이 책을 편집한 곽주현 창비 편집자는 "찰나의 감정들을 초록빛 생명의 언어에 담아내어 일상의 사소한 변화와 미세한 떨림 속에서 사랑의 본질과 삶의 진리를 길어 올리려는 태도가 눈부시다"고 소개했다.
kih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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