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글로벌 미술 시장은 지난 몇 년간 뜨거웠던 유동성 파티가 남긴 잔상을 뒤로하고, 한층 차분하고 선별적인 ‘심도 있는 시장(deep market)’으로의 진입을 알렸다. 숫자로 증명된 성과는 견고했다. 필립스옥션은 2025년 한 해 동안 전년 대비 10% 증가한 약 1조4000억 원의 글로벌 매출을 기록하며 시장의 신뢰를 재확인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경매 외 판매 방식인 프라이빗 세일 부문이 66%라는 경이로운 성장률을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컬렉터들이 이제 공개된 경매장의 경쟁을 넘어, 자신만의 은밀하고 정교한 취향을 완성하기 위해 경매사의 보다 밀도 높은 큐레이션을 요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필립스옥션 한국지사 대표로서 현장에서 목격한 변화의 본질은 매출 수치 너머에 있다. 이제 컬렉터들은 캔버스라는 프레임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정의하는 모든 고귀한 대상에서 ‘희소성’과 ‘프로버넌스(provenance, 소장 기록)’라는 공통분모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수집 대상이 전통적 ‘미술품’에서 ‘라이프스타일 자산(lifestyle assets)’으로 그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거실로 들어온 6700만 년의 시간
지난해 11월 뉴욕에서 열린 근현대 미술 이브닝 세일 현장은 그야말로 혁신의 시험대였다. 6700만 년의 세월을 견뎌낸 트리케라톱스 화석 ‘세라(Cera)’가 장-미셸 바스키아와 조앤 미첼의 마스터피스 사이에서 위용을 드러냈을 때, 장내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실 설립 이래 20세기와 21세기 미술에만 집중해온 필립스옥션이기에, 자연사 유물을 글로벌 경매 중 가장 큰 뉴욕 메인 이브닝 세일의 전면에 배치하는 것은 전례 없는 모험이었다. 내부에서도 격렬한 논의가 오갔다. “과연 누가 공룡을 사겠는가”, “이것은 특정 미술관이나 소수 박물관의 영역”이라는 회의적 시각도 존재했다. 그러나 필립스의 전문가 팀이 주목한 가치는 명확했다. 진정한 하이엔드란 ‘남들이 가진 것을 나도 갖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가치’를 소유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최고의 안목을 가진 클라이언트들은 자신의 공간에 타인과 유사한 블루칩 작가의 그림만을 걸어두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간의 오라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압도적 서사를 지닌 오브제를 갈구한다. 경매 결과는 우리 예측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처음에는 자연사 전문가들만이 잠정적 고객일 것이라 예상했으나, 실제 경합에 참여한 이들은 평소 미술품을 수집하는 전통적 아트 컬렉터가 다수였다. ‘세라’는 최저 추정가의 2배가 넘는 약 78억 원에 낙찰되었다. 이 세일이 주목받은 것은 단순히 이색적인 출품작 때문만은 아니다. 공룡 화석은 미술 작품처럼 작가나 사조로 평가되지 않지만, ‘지구상에 단 하나뿐인’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점에서 강력한 독점성을 지닌다. 〈타임스(The Times)〉는 이를 두고 “경매가 더 이상 미술사적 서사에만 기대지 않고 컬렉터의 라이프스타일과 상징 자산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세라’를 둘러싼 관심은 전통적 컬렉터뿐만 아니라 문화와 자연사를 아우르는 새로운 수요층의 확장을 증명했다. 이것이 바로 경계가 허물어진 21세기형 컬렉팅의 실체다.
수요 제한 환경에서 혁신적 선택
이러한 사례는 개별 카테고리의 성과라기보다 경매 세일 구조 전반의 거대한 변화를 시사한다. 2025년 전후로 글로벌 주요 경매사들은 단일 미술 카테고리에 집중하기보다 워치, 주얼리, 자연사 오브제, 디자인 등을 포함한 다층적 세일 구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시장이 호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실험이 아니다. 오히려 수요가 제한된 경제 환경에서 컬렉터들의 꾸준한 관심과 참여를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이고도 전략적인 선택에 가깝다. 제한된 자원을 가진 컬렉터들이 더 까다로운 기준으로 대상을 선별할 때, 경매사는 그들의 삶 전반을 아우르는 최상의 큐레이션을 제안해야 시장의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적 확장은 시계와 주얼리 분야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다. 2025년 필립스에서 모든 카테고리를 통틀어 최고가 기록을 세운 주인공은 파텍필립의 빈티지 시계였다. 제네바에서 약 256억 원에 낙찰된 ’Ref. 1518’ 스테인리스스틸 모델은 역대 빈티지 파텍필립 손목시계 중 최고가를 경신하며, 시계가 정밀기계를 넘어 완벽한 역사적 서사와 희소성을 지닌 ‘자산’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2023년 홍콩에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푸이)의 파텍필립 시계를 약 82억 원에 낙찰시키며 역사적 프로버넌스의 위력을 보여준 필립스, 이번 기록을 통해 시계 마켓의 리더로서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주얼리 역시 19세기 미국 ‘밴더빌트 가문 주얼리’ 컬렉션이 낙찰률 100%를 기록하며 추정가의 4배에 달하는 성과를 거두는 등 기염을 토했다. 컬렉터들은 이제 보석의 크기보다 그 대상이 거쳐온 시간의 무게, 즉 ‘누가 소유했는가’에 대한 서사에 열광한다. 수집가들에게 시계와 주얼리는 이제 ‘손목 위에 올리는 마스터피스’이자 ‘움직이는 조각’으로서 미술품과 대등한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안전 자산으로의 회귀
최근 글로벌 미술 시장 조사 회사 아트택틱(ArtTactic)의 리포트가 보여주듯, 2025년 하반기 아트 마켓의 또 다른 축은 ‘안전 자산’으로의 회귀다. 2021년 정점을 찍은 울트라 컨템퍼러리, 즉 1975년 이후 출생 작가들에 대한 투기적 열풍은 잦아들었지만, 1945년 전후 포스트워와 근현대 마스터들의 작품은 견고한 성장을 이어갔다. 실제로 2025년 현대미술 시장이 조정을 거치는 동안 모던 아트는 19.4%, 인상주의는 무려 80.4%의 성장을 기록했다. 불확실한 경제 환경에서 컬렉터들은 검증된 역사적 가치에 투자하며 심리적 위안과 경제적 안정성을 동시에 찾고 있다. 이에 발맞춰 글로벌 경매시장 역시 뉴욕, 런던, 홍콩을 중심으로 ‘모더니즘’에 초점을 맞춘 큐레이션을 강화하는 추세다. 단순히 옛 거장의 작품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현대적 디자인 가구와 20세기 마스터들의 회화, 그리고 빈티지 시계를 한 공간에 유기적으로 배치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렇듯 다각화된 접근 방식은 컬렉터들이 기존의 단일한 수집 패턴에서 벗어나 더 넓은 안목으로 시장을 조망하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
미래의 수집, 그 변하지 않는 본질
2026년은 필립스옥션 설립 230주년이 되는 해다. 1796년 해리 필립스가 런던에서 경매를 시작한 이래, 수세기 동안 우리가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시장의 유행은 변할지언정 ‘독보적 희소성을 가진 가치를 소유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열망’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컬렉팅이 부의 과시 혹은 특정 사조에 대한 추종이었다면, 오늘날의 컬렉팅은 자신의 세계관을 정교하게 구축하고 표현하는 고도의 지적 행위다. 그것이 6700만 년 전의 화석이든, 1940년대의 전설적 시계든, 혹은 거장의 캔버스든 상관없다. 수집의 성패는 결국 그 대상의 대체 불가능한 희소성과 그 안에 담긴 시간의 기록, 즉 프로버넌스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향유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제 컬렉팅은 투자를 넘어 삶의 방식 그 자체가 되었다. 2026년 봄, 우리가 마주할 새로운 물결 속에서 당신은 어떤 유일무이한 가치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정의할 것인가. 경매시장의 혁신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되며, 우리는 그 해답을 찾는 컬렉터들의 여정에 가장 현대적인 안목과 230년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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