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통화의 의미가 바뀌고 있다. 과거의 기축통화가 국가의 신뢰와 군사력, 금융 시스템 위에 세워졌다면 앞으로의 기축통화는 네트워크와 플랫폼 그리고 AI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 위에서 힘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스테이블코인은 이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는 단순한 디지털 자산이 아니라 달러 패권의 연장선이자 새로운 결제 질서의 실험장이며, 가속화되는 AI 시대 화폐의 원형일 수 있다. 투데이신문은 총 5편의 기획을 통해 통화의 미래를 둘러싼 변화의 흐름을 짚고 그 변화가 금융과 산업, 국가 경쟁력에 던지는 질문을 살펴본다.
【투데이신문 문영서·최예진 기자】세계 각국이 달러 패권에 맞서 디지털 화폐 전쟁에 참전하며 통화 주권 수호를 위해 나섰다.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e-CNY) 공세와 유럽·일본의 자국 통화 연동 코인 발행 등 기존 결제 인프라 다각화에 나선 반면 불안정한 금융 환경을 가진 신흥국을 중심으로는 오히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수요가 급증하며 ‘디지털 달러라이제이션’이 가속화되는 모습이다.
달러 비중 하락과 중국의 e-CNY 공세
25일 국제통화기금(IMF)의 ‘외환보유액 구성(COFER)’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글로벌 공적 외환액 내 달러 비중은 56.92%를 기록하며 1분기(57.79%) 대비 하락세를 보였다. 달러의 지배력이 흔들리는 사이, 중국은 e-CNY와 혁신적 결제 인프라를 앞세워 위안화 국제화와 ‘탈달러’ 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25년 한 해 동안 e-CNY의 누적 거래액은 16조7000억위안(약 3627조2400억원)을 돌파했으며, 결제 건수로는 34억8000만 건에 달했다. 이는 2023년 대비 약 800% 급증한 수치다. 중국은 암호화폐 거래를 엄격히 금지하는 동시에, 정부 통제 아래 e-CNY를 국가 전략 자산으로 육성하고 있다.
특히 국제청산은행(BIS)과 홍콩·중국·태국·아랍에미리트(UAE)가 공동 주도한 ‘mBridge’ 프로젝트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2025년 mBridge를 통해 처리된 결제액 555억달러 중 e-CNY의 비중이 95%를 차지했다. 해당 시스템은 기존 스위프트(SWIFT) 방식의 송금 시간을 초 단위로 단축하며 실시간 국경 간 결제를 구현했으며, 이는 미국의 금융 제재를 우회할 수 있는 실질적인 통로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은 상하이 국제 운영센터 개소 등 인프라 구축과 더불어 인접국과의 통화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지난 3년간 러시아 은행과 기업들은 중국의 국경 간 은행 간 지급 시스템(CIPS) 활용도를 높여왔으며, 그 결과 2024년 양국 간 에너지·농산물 등 교역량이 2500억달러를 넘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해당 거래의 상당 부분은 위안화와 루블화로 직접 결제됐다.
나아가 중국 국무원은 위안화 연동 스테이블코인 도입 로드맵을 검토 중이다. 이는 현재 테더(USDT) 등 달러 중심의 디지털 자산 시장에 도전하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중국 정부는 2025년 8월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서 국경 간 무역 확대 방안을 논의하고, 홍콩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위안화 스테이블코인 시범 발행을 추진해 위안화의 글로벌 영향력을 극대화할 계획이다.
일본·EU의 반격, ‘규제형 자국 코인’으로 승부수
일본과 유럽연합(EU) 역시 달러 중심의 스테이블코인(USDT·USDC)을 견제하기 위해 자국 통화 연동 코인 발행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은 2023년 자금결제법 개정을 통해 엔화 스테이블코인(JPYC) 발행을 허용했다. 작년 10월 처음 발행을 시작한 JPYC(일본 엔과 1대 1로 교환)는 올해 1월까지 발행액이 약 10억엔(92억9020만원)에 달한다. 1회 발행 상한은 100만엔(929만원)으로 설정돼 개인 사용자를 주요 타겟으로 한다.
미쓰비시UFJ 등 메가뱅크들이 공동 발행 실험에 참여하며, 기업 간 송금 수수료 절감과 디지털 패권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세계 최초의 가상자산 포괄 규제안인 MiCA(미카)를 통해 유로화 주권 지키기에 나섰다. 비유로화 스테이블코인에 엄격한 발행 한도를 부과하자, 바이낸스 등 주요 거래소들은 USDT 대신 유로 기반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MiCA는 비유로 전자화폐토큰(EMT, USDT·USDC 등)에 발행 한도와 준비금 중 30%를 EU 내에 예치하도록 의무를 부과한다.
금융결제원 금융연구소 김필수 전문연구위원은 “EU는 스테이블코인을 암호자산으로 분류하며, 트래블룰(Travel Rule) 규정이 국내외 구분 없이 소액 암호자산 전송에도 적용된다”며 “MiCA 규제는 전자화폐토큰 전송을 자금이체가 아닌 암호자산 전송으로 규율해 금액과 무관하게 전송자·수취자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으며, 이는 소액 분할 전송을 통한 자금세탁(AML) 회피를 차단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1000유로 초과 시에는 비수탁 주소(CASP)의 경우 지정 주소로 소액 송금하거나 지갑 소프트웨어를 통해 디지털 서명으로 소유권을 확인하는 절차를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현재의 디달러라이제이션은 달러의 완전한 몰락보다는 ‘결제 인프라의 다변화’에 가깝다. 달러가 여전히 외환보유액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지만, e-CNY와 각국의 스테이블코인이 대안 인프라로서 독점적 지위를 조금씩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의 기축통화 패권은 누가 더 효율적이고 포용적인 디지털 결제망을 선점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견고한 달러 성벽, ‘디지털 달러라이제이션’의 심화
반면 민간 경제 안에서는 달러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2024년 기준 스테이블코인 거래 규모가 약 23조에 달하며 전년 대비 90% 증가했다고 밝혔다. 그 중심에는 여전히 달러 연동 코인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해석이다.
미국은 정부 차원의 CBDC 발행 대신 민간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정비하며 달러의 디지털 영토 확장을 용인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특히 금융 인프라가 불안정하거나 자국 통화 가치가 불안한 신흥국을 중심으로 법정 통화 대신 디지털 달러(USDT 등)를 사용하는 ‘디지털 달러라이제이션’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포브스에 따르면 이미 스테이블코인이 실험 단계에서 인프라 단계로 나아간 국가들도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이 지역 최대 암호화폐 플랫폼인 비트소(Bitso)는 지난 2024년 한 해 동안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서 65억달러 규모의 송금액을 처리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연간 1조5000억달러 규모의 암호화폐 거래가 이뤄지고 있으며, 스테이블코인은 이중 약 4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송금이 이뤄지는 나이지리아 역시 스테이블코인이 암호화폐 시장에서 40% 가량을 차지해, 나이지리아 중앙은행은 지난해 스테이블코인 도입이 미칠 영향을 탐구하기 위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한 바 있다. 지난해 블록체인 데이터 플랫폼 체이널리시스(Chainalysis)는 나이지리아가 탈중앙화 금융(DeFi) 유입액 부문에서 3위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이뿐만 아니라 현재의 전통적인 국외 송금 시장은 구조적인 비용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세계은행(World Bank) 등에 따르면 지난해 1분기 기준 글로벌 평균 송금 수수료는 약 6.49%에 달하며, 특정 구간에서는 10%를 상회하기도 하는 가운데 해외에서 근로하며 본국으로 송금하는 저소득·중소소득국가 국민들이 많고, 일부 국가에서는 송금 규모가 GDP의 25%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송금이 GDP 대비 25% 이상을 차지하는 상위 5개국은 모두 하위 중소득국(LMICs)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이다. 이러한 국가들에서는 송금 거래 수수료를 최대한 낮추는 것이 가계 소득 유지와 빈곤 완화 측면에서 특히 중요하다.
블록체인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은 중간 매개 기관을 제거함으로써 이 비용을 1% 미만으로 대폭 낮춘다. 정산 시간 또한 수일에서 수분 단위로 단축된다. 암호화폐 투자 회사인 키록(Keyrock)과 남미 암호화폐 거래소인 비트소(Bitso) 스테이블코인이 이런 압도적인 효율성을 바탕으로 2030년까지 글로벌 송금 시장의 12% 이상을 점유할 것으로 전망했다.
아크포인트 오태완 대표는 “이미 신흥국과 미국 사이에 송금이나 정산 거래를 할 때 스페이스 엑스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며 “앤트로픽을 비롯해 몇몇 AI 회사들 같은 경우에도 해외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월급을 스테이블코인으로 지급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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