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안도현 시인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시골 마당에 모여 옛이야기를 듣듯 고즈넉하고 구수한 강연이었다. 강연 말미에 한 청중이 젊은이들에 대한 조언 한마디를 청했다.
과거에 읽었던 시인의 열정적인 시들에 비춰 볼 때 뜨거운 삶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알았다. 예컨대 그의 시에서 ‘삶이란/나 아닌 그 누군가에게/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연탄 한 장),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너에게 묻는다)’ 같은 표현을 떠올린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시인은 인연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이제 칠십을 바라보는 시인의 입에서 나온 인연이라는 말은 조용한 무게감이 있었다.
이어 또 다른 청중은 시인의 마음을 배우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시인은 올봄에 작은 꽃 이름 하나 배워 보면 어떻겠느냐고 이야기했다.
그 말에 이어 예로 든 꽃은 화려하거나 거창한 서사가 있는 꽃이 아니었다. 흔하게 보이면서도 눈길도 주지 않고 발길에 차이는, 보잘것없는 애기똥풀 같은 꽃이었다.
시인이 쓴 애기똥풀이라는 시가 있다. ‘서른다섯 될 때까지/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애기똥풀). 이름을 안다는 것은 명칭을 기억하는 단순한 행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존재를 나의 우주 안으로 받아들이는 인연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고속화된 속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아침이면 짐짝처럼 지하철에 몸을 싣고 점심에는 식당 앞에 길게 줄을 서서 허기를 채우고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야근과 지친 몸을 이끌고 참석하는 회식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잊은 채 하루의 일상에 젖어 살고 있는 지 오래다.
어디 그뿐인가. 스마트폰만 열면 쏟아지는 바깥세상의 소식들은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끝을 알 수 없는 전쟁 보도, 유령처럼 떠도는 경제위기설, 불안한 환경위기론까지. 거대한 담론과 비극적인 뉴스들이 현대인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휘젓고 있다.
이런 소음 속에서 우리는 정작 곁에 와 있는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엄동설한의 모진 추위를 견뎌내고 딱딱한 땅 껍질을 뚫고 올라온 봄꽃들의 생명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이로운 서사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뜻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름다운 봄꽃을 마주할 여유조차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시인들을 국가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를 가까이 하는 것을 경계한 바 있다.
그는 시가 인간의 이성을 흐리고 감정을 과도하게 자극해 국가의 질서를 해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논리적 이성과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를 꿈꿨던 그에게 시인의 감각적인 언어는 다소 위험한 요소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현대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플라톤이 경계했던 그 ‘시적 여유’가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이 효율과 논리, 수치로 계산되는 빡빡한 틈새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메말라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어 있는 여유, 즉 공백의 미학을 지닌 시인의 시선이야말로 이 살풍경한 시대를 버티게 하는 완충지대가 돼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직 쌀쌀하지만 그래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이제 곧 길모퉁이에 애기똥풀이 고개를 들고 활짝 피어날 것이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이 시대에 마음에 노란 봄꽃 하나 들여놓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애기똥풀의 꽃말은 치유, 회복, 희망이다.
그 밖에도 개나리, 철쭉, 민들레, 매발톱꽃, 제비꽃. 이름없는 수많은 꽃들. 올봄에는 저마다의 의미를 담고 자기 자리에서 사력을 다해 생명을 움트고 피어나는 봄꽃과 인연을 맺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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