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된 고용환경이 인공지능(AI) 시대 한국 경제의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저조한 성과에도 어떠한 조치나 불이익이 없다시피 하다 보니 기업 내에 한 사람이 수십, 수백명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할당량 채우기에만 급급한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는 지적이다. 반면 이미 해외 글로벌 기업들은 철저한 성과주의와 차등보상으로 효율·생산성 극대화 및 기술력 확보에 나서고 있어 상대적으로 경쟁 우위를 점하기 어려울 것으로 평가된다. 효율·생산성과 기술력은 모두 가격 경쟁력, 품질 경쟁력 등 기업의 생존과 직결된 사안들이다.
경직된 노동시장의 비극…취업 목매던 청년들도 취직 후엔 "이젠 됐다" 안주
청년 취업 문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청년고용률은 43.3%로 전년 동기 대비 1%p 떨어졌다. 22개월째 하락세다. 반면 청년실업률은 7.7%로 2월 기준 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청년 취업자수 역시 14만6000년 감소했다. 거듭된 실패로 인해 쉬는 청년들도 갈수록 늘고 있다. 취업 문턱이 높아지면서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고 쉬는 청년들도 늘고 있다. 한은, 경총 등에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쉬는 청년 수는 45만명에 달했는데 이 중 10만명 이상은 취업을 희망하는 이른바 '취업준비생(이하 취준생)'이었다. 대부분의 취준생들은 쉬는 기간 동안 직무 관련 업무 경험, 일자리 정보 획득, 직무 관련 자격증 취득, 학점·외국어 점수 취득 등 취업 준비에 매진한다.
그런데 어렵게 취업에 성공한 청년들의 태도는 취업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다. 수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조용한 퇴사'가 이제는 하나의 문화처럼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조용한 퇴사'는 실제 퇴사를 하진 않지만 자신이 맡은 최소한의 업무만 처리하고 그 이상 성과를 내거나 회사에 기여하려는 의지가 없는 상황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앞서 2024년 HR 플랫폼 기업 인크루트가 직장인 109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재 조용한 퇴사 상태인지 묻는 질문에 51.7%가 '그렇다'고 답했다. 또 직전해 구인·구직 전문 포털 알바천국이 144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선 79.7%의 응답자가 조용한 퇴사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다수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오로지 취업을 목표로 노력하고 취업 이후엔 곧장 안주해버리는 한국 사회 분위기는 고용시장의 경직성에서 기인한 결과로 분석된다. 성과 없이도 큰 과실만 없으면 해고를 피할 수 있는데다 시간만 흐르면 저절로 연봉이 오르다 보니 업무 몰입도가 점차 떨어지고 자연스레 성과와도 점차 멀어지는 것이다. 글로벌 여론조사기관 갤럽의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들의 업무 몰입도는 13.8%로 105위 수준에 그쳤다. 세계 평균치는 물론 동아시아 지역 평균(18%)보다 낮은 수치다. 1위인 우즈베키스탄(45.3%)과는 3배 넘는 차이다.
한국은 특히 조직 분위기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적극적 비몰입 직원' 비율이 23.9%에 달했다. 우리나라 보다 직원 몰입도(6.9%, 136위)가 낮은 일본에 비해서도 높은 수치다. 갤럽은 "직원 몰입도가 낮다는 것은 곧 조직이 직원의 성장에 몰입하지 않았다는 신호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한국 직장인의 임금 상승률은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은 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한국 근로자의 근속연수 1년 증가에 따른 임금 상승률은 2.0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7개국 평균(0.71%)의 두 배에 달한다. 미국(0.89%)과 일본(1.03%), 독일(1.08%)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서도 훨씬 높다.
단순 업무 사라진 AI시대…철저한 성과주의 美 빅테크들과 생산성·가격 경쟁 가능할까
국·내외 전문가들은 취업이 목표가 되는 현상, 취업 이후 업무에 무관심한 현상 등은 국가 경제를 송두리째 흔들만한 심각한 사안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AI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역할'과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상' 또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그 중심엔 일에 대한 몰입을 기반으로 한 철저한 성과주의가 자리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구성원들이 성과에 대한 의욕 없이 기계적인 업무에만 매진하는 기업은 AI 시대에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라는 주장이다.
문제는 해외는 이미 이러한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 기업들은 고용경직성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허송세월만 낭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글로벌 AI 패권의 선두에 서 있는 미국 기업들은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 발맞춰 경영 전략에도 꾸준히 변화를 주고 있다. 아마존(Amazon)은 코로나 팬데믹19 이후 이미 수만명을 해고한 후 올해 초에도 1만6000명에 달하는 본사(Corporate) 인력을 추가로 정리했다. 조직 내 만연한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AI 관련 투자를 가속화한다는 취지다. 오라클(Oracle) 역시 AI 데이터센터 확장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대대적인 인력 감축을 추진 중이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제 때 이뤄지지 않는다면 향후 시장에서 밀려난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다.
국내·외 경제 싱크탱크들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 빅테크들이 급변하는 산업 환경에 발맞춰 인력 운용 전략을 꾸준히 수정할 수 있는 이유는 채용과 해고가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미국 노동법의 근간이자 기업과 근로자를 철저한 계약관계로 인식하는 임의고용 원칙이 자리하고 있다. 인종, 성별, 종교 등 법적으로 보호받는 권리에 대한 차별적 해고가 아니라면 기업은 경영상 필요나 직원의 성과 부족을 이유로 즉각적인 해고가 가능한 구조다. 반대로 직원 역시 원할 때 언제든 퇴사할 수 있는 강력한 자유를 갖는다. 해고는 어렵지만 퇴사는 언제든 가능한 한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노사 간 평등을 근간으로 한 유연한 고용환경은 대량 해고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하는데도 유리한 측면이 많다. 한 기업에서 수천명, 수만명을 해고하는 게 오히려 다른 기업에겐 인재를 유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식이다. 앞서 아마존의 대량해고 이후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 사이에선 아마존의 대량해고 이후 '축제'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인재영입 경쟁이 활발하게 이뤄진 게 대표적 사례다. 특히 미국의 경우 철저히 개인의 능력 위주로 취업이 되기 때문에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재취업한 후 다시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현상도 자연스럽다. 반면 한국은 대기업 퇴직 후 중소기업에 재취업하면 다시 대기업 취직이 불가능에 가깝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견인했던 기업 내의 '한국식 성과주의'는 최근 그 모습을 거의 잃어가고 있다"며 "과거에는 조직에 대한 헌신과 성과에 따른 확실한 보상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작동했지만 요즘은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문화가 주류 문화로 자리 잡다 보니 조직의 목표와 개인의 몰입이 괴리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괴리를 극복하고 AI 시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용 경직성 해소가 선행되어야 한다"며 "고용 유연성 확보는 단순히 기업의 인력 감축을 용이하게 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적 자원의 효율적 재배치를 통한 기업 경쟁력 강화, 채용 시장의 선순환을 통한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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