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활동'과 '가족'…발달장애인 은혜 씨가 행복하게 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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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활동'과 '가족'…발달장애인 은혜 씨가 행복하게 사는 이유

프레시안 2026-03-24 15:03:0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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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장애가 욕설로 사용되거나 약점이 될까 숨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당당히 자신의 장애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드라마, 유튜브, 연극, SNS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중의 편견을 깨부수고 있다. <프레시안>은 장애를 소재로 대중문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온 과정, 활동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들었다. 편집자

18일 방문한 경기도 양평의 한 카페에는 독특한 화풍의 캐리커처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휴일'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는데도 주민들이 수시로 이곳을 방문해 커피와 샌드위치를 즐겼다. 음료를 나르던 점원들은 어느 순간 자리에 앉아 손님들과 함께 웃고 떠들었다. 단순히 음료를 즐기러 오는 카페라기보다 놀러 오는 이웃들을 환대하는 사랑방처럼 보였다.

시끌벅적한 카페 바로 옆엔 붓과 팔레트, 물감 등 미술 도구로 빼곡한 화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화실 한 켠에 위치한 이젤에는 방금 완성한 듯한 그림이 놓여 있었다. 이색적인 그림체가 카페에서 본 캐리커처들을 떠오르게 했다. 종합해 보니, 이곳 카페는 사랑방과 이 화실 주인의 전시장을 겸하는 공간이었다.

화실의 주인이자 캐리커처 작가인 서은혜(활동명 정은혜·35) 씨는 바로 옆에서 화실을 둘러보는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청하자 흔쾌히 받아들이면서도, 대화를 나누는 내내 붓과 물감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은 산만하다기보다 예술 활동에 대한 열정을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 씨가 이날 그린 그림의 제목은 '부귀영화'다. 중국인 손님이 서 씨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전시된 작품을 보고 직접 화실을 찾아와 요청한 그림이다. 캐리커처 한쪽에 영화 소품인 클리퍼 보드가 있어 이유를 물었더니 "작품명이 부귀'영화'이기 때문"이라는 답을 받았다. 아, 서 씨의 미술 세계는 참 심오하면서도 직관적이다.

▲캐리커처 작가 서은혜 씨가 중국인 손님이 요청한 작품 '부귀영화'를 그리고 있다. ⓒ프레시안(박상혁)

서 씨는 2013년 미술 활동을 시작한 이래 매일 같이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내고 있다. 지금까지 서 씨가 그려낸 초상화는 6000여 점에 달한다. 지칠 만도 한데, 서 씨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그의 열정에 호응하듯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요청이 전국 각지에서 쏟아지고 있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어떤 느낌으로 그려야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해요. 딱히 저만의 특징을 신경 쓰지는 않고요. 그냥 그때그때 제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요. 채색까지 해서 그림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따뜻한 그림이에요'라며 좋아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저도 기분 좋아져요. 그림을 그리면 사람들과 만날 수 있고, 사람들이 좋아해 줘서 행복해요."

서 씨 말처럼, 그가 미술 활동에 전념하는 이유는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어서다. 서 씨는 다운증후군으로 인해 특별한 외모와 사고방식을 갖게 됐다. 통상 다운증후군 장애인은 인내심이 강하고 돌발 행동이 적어 적당한 생활 환경과 보호가 있다면 별 탈 없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사는 양평은 장애인 지원 제도가 충분치 않았고, 또래 친구들도 서 씨의 특별함을 외면했다. 이 때문에 서 씨는 유년 시절 내내 고립감을 느끼며 사람과의 만남을 갈구하게 됐다.

▲경기 양평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아트센터에 전시된 서은혜 씨 작품. ⓒ프레시안(박상혁)

극심한 외로움에 조현병까지 겪던 서 씨의 삶은 2013년 어머니 장차현실 씨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180도 달라졌다. 1990년대 말부터 페미니스트이자 만화 작가로 이름을 알려 온 장차 씨는 자신의 딸이 잡지 속 여성 모델을 연필로 그려내는 모습을 보고 그가 미술에 재능이 있음을 한눈에 알아 봤다.

"처음에는 은혜가 혼자 있으면서 힘들어하기에 제 화실에 와서 청소 일을 하라 했던 거거든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보고 자기도 따라 그리기에 편하게 연습하라고 갱지를 줬죠. 그러다 어느 날 본 은혜 그림에서 에곤 실레(오스트리아 출신 유명 화가)의 선이 느껴졌어요. 이건 절대 제가 가르친 선이 아니에요. 그때 알았죠. 은혜에게 정말 좋은 재능이 있단 걸요."(장차현실 씨)

서 씨는 어머니의 전폭적 지지 속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그랬듯 대중도 금세 서 씨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봤다. 2017년부터 최근까지 국내는 물론 미국 등 해외에서도 수십 차례 전시회를 열었다. 서 씨는 이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그림을 매개로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작품을 보며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이 좋았다.

미술 활동을 시작으로 서 씨 곁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자리 잡고 있다. 서 씨가 대표로 있는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아트센터'에는 발달장애인 작가 10여 명이 모여 서 씨와 함께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서 씨는 이곳에서 만난 지적장애인 조영남 씨와 교제를 시작해 지난해 5월 결혼식을 치렀다. 옆자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서 씨에게 첫눈에 반한 조 씨가 매일 커피를 만들어 준 것을 계기로 둘은 단 한 번의 다툼 없이 결혼까지 하게 됐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서은혜 씨. ⓒtvN드라마 유튜브 갈무리

서 씨의 활동은 이제 화실 안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강연과 다큐멘터리, 드라마, 연예 프로그램 등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고 있다. 2022년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한지민의 쌍둥이 언니 역할로 출연한 일은 서 씨가 미술계를 넘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결정적 계기였다.

지난해 열린 'SBS 연예대상'에서는 '선한 영향력상'을 수상했다. 본인의 결혼 생활을 예능 프로그램 <동상이몽2>를 통해 공개해 사랑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일깨웠다는 취지의 상이었다. 서 씨는 남편 조영남 씨와 함께 시상식에 참여해 "저희 발달장애인도 결혼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장애인 권익 향상을 촉구하는 일에도 머뭇거림이 없다. 서 씨는 지난해 10월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부 종합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권리중심 일자리를 통해 일도 하고 월급도 받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더 많은 발달장애인 친구들이 당당하게 일할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해달라"고 호소했다. 2024년 더불어민주당 서미화·조국혁신당 김선민 의원이 대표발의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지원 특별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 달라는 뜻이었다.

현재 서 씨와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소속 동료 작가들은 경기도가 시행 중인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일자리 사업'을 기반으로 미술 활동을 하고 있다. 권리중심 일자리는 사회참여 및 경제활동 기회를 박탈당한 중증장애인이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권리옹호·문화예술·인식개선 등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일자리다.

문제는 권리중심 일자리 지원 사업이 지방자치단체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2020년 국내 최초로 권리중심 일자리 사업을 시작한 서울시가 오세훈 시장이 들어선 2023년 돌연 폐지를 선언하고 다른 일자리 사업으로 대체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중증장애인 단체들은 권리중심 일자리 사업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정부도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장차 씨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장애인에게 최저임금 적용 제외를 허가하고 단순노동 위주로 일을 시키는 배제적인 구조"라며 "언어적 소통이 어려운 장애인에게 문화예술 활동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란 것을 은혜를 보면서 확신하게 됐다. 장애인이 노동을 통해 자기 존재를 살펴볼 수 있으려면 권리중심 일자리가 확대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개입해 지자체의 부담을 덜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조영남(왼쪽) 씨와 서은혜(오른쪽) 씨. ⓒ서은혜 인스타그램 갈무리

서 씨는 지금의 삶이 무척 행복하다. "더 이상 이루고 싶은 게 없다"고 할 정도다. 평생 함께 살아갈 배필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동료들,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는 가족과 생활에 어려움 없도록 돕는 활동지원사, 서 씨의 행보를 응원하는 팬들이 있으니 행복은 자연스러운 감정일 테다.

"행복하죠. 이제는 저 혼자가 아니니까요. 어릴 땐 애들이 저를 놀리고 왕따 시켰지만 지금은 친구들이 많아요. 그동안 혼자 그림을 그려 왔지만 이제는 동료들과 다같이 그림을 그려요. 근무시간이 끝나면 같이 점심 먹고 커피 마시고, 대화 나누고 때로 생일파티도 해요. 오빠(조영남)는 성실하고 밝고 잘 웃고, 저를 걱정해 줘요. 그냥 이렇게 매일매일 그림 그리면서 오빠랑 같이 사는 게 제 목표에요."

단 하나, 서 씨가 행복한 삶을 위해 포기한 게 있다. 그는 출산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단호히 "아기는 안 갖겠다"고 답했다. 이유를 묻자 "우리 부부가 장애인인데 만약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으면 힘들다. 낳고 싶어도 낳으면 안 된다. 그래서 엄마가 되기 싫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장애로 인해 겪는 어려움은 없다고 말하던 서 씨가 유일하게 장애로 인한 어려움을 말한 순간이었다.

서 씨의 말에 안쓰러운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 서 씨 스스로 자신을 향한 연민을 단호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서 씨는 출산 없이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미술을 매개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행복을 나눌 계획이다. 서 씨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당부의 메시지를 전했다.

"사람들이 제게 '팬이에요', '사랑스러워요', '남편과 행복하게 잘 사세요'라고 말해요.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런데 사람들은 '피곤하겠어요', '힘들지 않아요?', '에휴 힘들겠다'라고 말하기도 해요. 그러면 저는 진짜 피곤하고 힘들어져서 듣기 싫어요. 우리 좋은 말만 했으면 좋겠어요. 괜히 쓸데없이 걱정하는 분들이 많은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잘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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