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임준혁 기자 |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중고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을 공격적으로 매입해 온 장금상선이 세계 1위 컨테이너(정기) 선사인 스위스의 MSC와 유조선 사업 부문을 50대 50으로 공동 경영하는 ‘세기의 거래(Deal)’를 추진하고 있어 해운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양사 간 거래가 주요국의 기업결합 심사를 통과할 경우 MSC의 막강한 자본력과 글로벌 네트워크, 장금상선의 공격적인 선대 확장이 합쳐져 글로벌 해운 시장의 질서를 뒤흔드는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23일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키프로스 경쟁위원회는 지난 11일 MSC그룹의 자회사 SAS 쉬핑 에이전시스 서비스(이아 ‘SAS쉬핑’)가 장금상선그룹의 유조선 부문 계열사 장금마리타임(Sinokor Maritime) 최대 주주인 정가현 이사로부터 공동지배권을 인수하는 기업결합 신고를 접수했다고 밝혔다.
그리스 경쟁위원회도 지난달 2일 정가현 이사와 SAS쉬핑, 장금마리타임간 기본 투자계약이 체결됐고 같은 달 25일 기업결합 신고서가 접수됐다고 최근 밝혔다.
▲ 그리스·키프로스 경쟁 당국, 기업결합 공시 발표
그리스·키프로스 경쟁 당국의 발표를 종합해 보면 정 이사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장금마리타임의 지분 50%를 SAS쉬핑이 인수해 정 이사와 SAS쉬핑이 50대 50으로 장금마리타임을 공동 경영할 계획이다. 장금상선그룹은 지난달 이 같은 내용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SAS쉬핑이 장금마리타임 지분 50%를 인수하기로 한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다
MSC그룹의 룩셈부르크 자회사인 SAS쉬핑은 운송 및 물류사업을 주력으로 영위하고 있으며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해상운송·물류 부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1989년 설립된 장금상선은 자산 19조원 규모의 재계 순위 32위에 올라 있다. 컨테이너선과 유조선 해상운송을 주력 사업으로 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 해운사가 합작해 설립한 장금유한공사(시노코)가 모태로 정태순 회장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룹 주력 계열사인 장금상선은 시노코가 지분 82%, 정 회장이 18%를 보유하고 있는 정기 선사다. 시노코는 정 회장이 지분을 전량 보유하고 있다.
장금마리타임은 2008년 장금상선 정태순 회장의 아들인 정가현 이사가 100% 지분을 출자해 설립한 국적 외항선사로 현재 장금상선그룹 계열사 소속이다. 업계에서는 장금상선그룹이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중고 VLCC를 대량 사들였는데 리세일(중고선 거래) 물량의 대부분을 장금마리타임이 매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장금마리타임, 글로벌 유조선 시장 점유율 17%
장금마리타임은 최근 1~2년 새 공격적인 선박 매입을 통해 VLCC 시장을 사실상 주도해 왔다. 올해에만 중고 VLCC 30척 이상을 추가 매입했다. 업계에선 현재 VLCC 130여척을 운영하는 장금마리타임의 전 세계 유조선 시장 점유율을 17% 수준으로 추산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러시아·이란·베네수엘라산 원유를 불법 운송하는 소위 ‘그림자 선단(shadow fleet)’을 제외하고 세계 모든 항로에서 문제없이 운항할 수 있는 초대형 VLCC 중 25%를 장금상선(장금마리타임)이 운영 중”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유조선 업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시장 지배력이다.
그간 글로벌 해운업계는 장금상선그룹이 단기간 내 VLCC 선대를 130여척까지 확대할 수 있었던 과정에서 MSC가 (선대) 확장의 조력자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
얼마 전 장금상선그룹이 컨테이너선 30척을 MSC에 한꺼번에 매각할 계획이란 외신 보도가 나와 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업계 일각에선 장금상선그룹이 컨테이너 해상운송 사업을MSC에 통으로 매각한 후 그 자금으로 VLCC를 대량 매입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실제 지난해 말 장금상선이 MSC에 5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규모의 컨테이너선 3척과 2700TEU급 1척 등 총 4척의 선박을 매각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컨테이너선 일괄 처분설은 설득력을 얻었다.
▲ MSC, 장금과 결합...유조선 시장 지배력 확보
하지만 이번에 그리스·키프로스 경쟁 당국의 발표로 MSC가 장금상선그룹의 컨테이너사업 부문을 매입하는 게 아니라 장금마리타임의 지분 50%를 확보해 VLCC 사업 부문을 공동 경영하는 형태의 투자로 공식 확인됐다. 장금상선그룹은 세계 최대 정기 선사인 MSC와 손잡고 VLCC 대량 매입에 나서면서 글로벌 VLCC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했다.
전 세계 컨테이너선 시장의 21%를 점유한 MSC는 그간 크루즈선, 벌크선, 자동차운반선 등으로 사업 영역 다각화를 추진해 왔다. 유조선 시장 진입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선 신조 발주를 통해 유조선 선대를 확보하려면 수년이 걸리는 만큼 장금상선그룹과 결합하면 MSC가 단숨에 유조선 시장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MSC와 장금상선그룹 간의 이번 거래가 성사되면 장금상선그룹은 단순한 투자 유치를 넘어 수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현금을 확보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2024년 말 기준 장금마리타임의 자산은 3조3794억원으로 확인됐다. 최근 대규모 VLCC 매입을 반영하면 자산 규모는 최소 6조원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금마리타임의 유조선 매입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23일 노르웨이 해운·조선 전문매체 트레이드윈즈에 따르면 장금마리타임은 수에즈막스급 원유운반선을 15척 이상 추가 매입을 추진 중이다. 최근 동형선을 리세일 방식으로 5척 확보했으며 향후 10척 이상을 더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선박 중개업체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금마리타임은 VLCC에 이어 수에즈막스급 원유운반선을 추가 확보해 상호운용성을 높이고 노후 선박 교체를 통한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도모하려는 것으로 업계에선 보고 있다.
해운업계에선 이번 거래가 성사될 경우 탱커 시장 판도가 바뀔 것으로 보고 있다. 기존 VLCC 시장은 노르웨이, 그리스의 중대형 선사들이 복점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MSC와 장금상선이 최대 25% 안팎의 점유율을 바탕으로 시장을 통제할 경우 운임과 선복 공급 구조 자체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다만 시장 지배력 확대에 따른 독과점 논란은 넘어야 할 문턱이란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거래가 마무리되려면 주요국 경쟁당국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며 “그리스와 키프로스, 한국, 노르웨이를 비롯해 관련국 규제 당국에서 기업결합 승인 절차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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