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도시에 살다 보면 '길'은 언제나 넘친다. 지도 앱을 켜면 최단 거리, 경유지, 대중교통, 택시, 자전거까지 수십 개의 루트가 뜬다.
무언가를 배우고, 보고, 사는 일도 마찬가지다. 프리다이빙 수업에서 강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눈을 감고, 고요한 자연 풍경을 떠올려보세요."
오랫동안 숨을 참는 기술을 익히기 전, 몸의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 마음부터 가라앉히는 연습이었다.
숲도 좋고, 바다도 좋다고 했지만, 내가 떠올린 건 작은 섬 하나였다. 햇볕이 따뜻하게 스며드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저 멀리 바다와 작은 섬을 바라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풋풋한 풀 냄새와, 막 마신 물이 남긴 달큰한 여운, 기분 좋은 봄바람이 살결을 스쳤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 사이로 '잘 왔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그 순간에 머무르며, 하나씩 감각의 스위치를 내려놨다.
인간의 오감 가운데 마지막까지 꺼지지 않는 것은 청각이라고 한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한 감각이다. 어쩌면 섬의 등대는, 밤새 소리를 대신해 주는 거대한 시각의 청각인지 모른다.
깜깜한 바다 한가운데서,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불빛 하나. 그 리듬은 폭풍과 어둠 사이에서도 "여기 있다, 괜찮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완전히 고요한 밤, 등대 불빛이 돌고 돌아 다시 나를 스치는 순간, 이상한 평온과 따뜻함이 밀려온다.
내 머릿속 그 섬은 실제로 존재한다. 소매물도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보고 싶은 섬'으로 자주 꼽는, 경남 통영 앞바다의 작은 섬이다. 엄밀히 말하면 소매물도와 그 앞의 등대섬을 통틀어 소매물도라 부르지만, 대중의 기억 속 이곳은 늘 하나의 풍경으로 남아 있다.
해 질 무렵 붉은빛을 머금은 바다, 하얀 등대, 그리고 섬과 섬을 잇는 얇은 바닷길이 기억에 남는다. 1980년대 '쿠크다스' TV 광고에 등장하면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의 뇌리에도 깊게 박힌 풍경이다.
나는 대학 1학년 여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들고 그 사진 한 장만 믿고 소매물도를 찾아갔다. 통영항에서 남동쪽으로 약 20㎞ 떨어진 바다, 배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나가면 닿는 섬이다.
지도상 면적은 0.5㎢ 정도에 불과하고, 해안선 길이도 5㎞가 채 안 된다. 자동차 도로도, 신호등도 없다. 섬을 한 바퀴 도는 길은 단 하나뿐이다.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그저 눈앞의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누구나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걸으면 두 시간 남짓이면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숲길을 지나면 갑자기 바다가 확 트이고, 다시 숲이 나타나며 풍경이 리듬을 바꾼다. 소매물도의 최고봉 망태봉(약 150m)에는 관세역사관이 있다.
이 작디작은 섬이 한때 남해안 밀수를 막기 위한 전초기지였다는 사실은, 그 풍경과 의외의 조합을 이룬다.
19세기 말 개항 초기, 통관 체계가 미비해 중국에서 들어오는 성냥과 아편을 제대로 막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에는 고추, 담배, 콩 등이 세관을 피해 남해안을 통해 들어왔고, 1970년대 이후에는 일본에 활어를 수출하는 배들이 돌아올 때 카메라, 금괴, 참깨 등 밀수품을 실어 오는 일이 크게 늘었다.
정부는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돌아오는 배가 거제 장승포항을 거쳐 오도록 통로를 정해 두고, 항로를 이탈하는 배는 레이더 기지에서 포착해 단속했다. 소매물도와 인근 지심도에 설치된 레이더 시설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운영됐다가, 지금은 관세역사관으로만 남았다.
관세역사관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면, 사람들이 가장 잘 아는 소매물도의 얼굴이 나타난다. 등대섬 전망대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등대섬의 비율과 곡선은 사진보다 실제가 훨씬 아름답다.
섬 위 언덕에 선 하얀 등대와 초록 잔디, 그 외에는 상업 시설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바다와 바위, 그리고 등대가 전부인 미니멀한 풍경에서, 문명과 자연이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겨우 타협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 든다.
소매물도와 등대섬의 해안 지형은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수직 절벽, 해식 동굴, 기괴한 모양의 바위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용바위, 부처바위, 거북바위, 촛대바위 같은 이름을 가진 바위들은, 누군가 일부러 조각해 놓은 것처럼 정교하다.
등대섬에서 소매물도를 바라보면 한 덩어리의 바위가 거대한 공룡이 바다에 앉아 있는 형상으로 보인다고 해서 '공룡바위'라는 이름도 붙었다.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하더라도, 사람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풍경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많은 이들의 발걸음일 이곳으로 이끄는 건 '열목개'라 불리는 바닷길이다. 밀물과 썰물이 만들어내는 신비의 길이다. 전국 여러 곳에서 '모세의 기적'이라 불리는 길이 있지만, 소매물도의 열목개는 바다 한가운데 섬과 섬 사이에 열린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하루 두 번, 물이 빠지면 크고 작은 몽돌이 모습을 드러내고, 약 50미터 길이의 자갈길이 열리며 사람은 걸어서 등대섬으로 건너간다. 물때를 놓치면 수심 1미터가 넘는 바닷물이 다시 길을 삼켜 버린다. 해와 달, 바람과 물살이 허락할 때만, 그 시간에만 건널 수 있는 길이다.
이 바닷길이 좋았던 건, 그곳에서는 '헤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다. 건널 것인가, 말 것인가. 건너기로 했다면 내가 할 일은 단순하다. 한 걸음씩 더 나아가, 끝까지 올라가, 뒤돌아보는 일이다.
등대섬 끝에 서서 막 건너온 몽돌길과 소매물도를 내려다볼 때, '이곳에 내가 있다니' 하는 감정이 밀려온다. 삶 전체가 아닌, 이 짧은 구간만큼은 선택을 끝내고 걸었구나, 하는 안도감 같은 것이다.
십수 년 전 어느 봄, 나는 작은 요트를 타고 남해를 항해하다가 우연히 소매물도에 다시 들른 적이 있다. 작은 배를 항구에 묶고 하루만 묵어가겠다고 섬 이장과 어촌계장을 찾아다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지막 배가 떠난 뒤, 첫 배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괜찮다는 허락을 받고, 페트병을 잘라 만든 의자에 앉아 멍게와 거북손, 미역을 먹었다.
거칠고 짠 내음이 입안을 가득 채우던 그 감각은 오래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섬은 약속이라도 지키듯, 몇 년이 지나 다시 찾아가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지막 배가 떠나고, 섬이 온전히 고요를 되찾는 시간이다.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두워진 밤, 등대섬의 불빛은 아주 잠깐씩 내 자리까지 미끄러져 와 닿았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리면, 어김없이 다시 돌아온다.
마음의 평온도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른다. 길게 붙잡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아주 짧게, 그러나 규칙적으로 돌아오는 어떤 순간이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이 섬에 늘 혼자 갔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굳이 이 외딴섬의 한밤을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등대 불빛을 바라보며 문득 묻게 된다.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여기 서 있을 날이 올까. 나는 앞으로 이곳에 몇 번이나 더 오게 될까.
소매물도는 통영에서 남동쪽으로 떨어진, 말 그대로 '먼 물'의 섬이다.
옛 지명 '매매도', '매미도', '매물도'에 들어 있는 '매·미·물'이 원래 '물'을 뜻하는 옛말이었다는 설이 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름에까지 새겨 넣은 셈이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건 불편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엔 오히려 매력으로 작동한다. 정보와 선택지가 넘쳐나는 도시에서, 우리는 늘 더 많은 '길'을 요구한다. 새로운 길, 더 빠른 길, 남들이 아직 모르는 길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선택지를 줄여 줘서라도 한 번은 끝까지 걸어가게 해 주는 길일지도 모른다. 지도 앱도, 추천 알고리즘도 소용없는, 단 하나의 둘레길과 하루 두 번 열리는 바닷길을 가진 섬이다.
소매물도 같은 곳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건 단순하다.
"방향을 바꾸고, 한 번은 끝까지 걸어보라."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시대이기에, 때로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마음에 말이다. 길이 하나뿐인 섬은, 선택의 과잉에 지친 도시인에게 가장 조용한 위로가 돼준다.
김정욱 (크루 및 작가 활동명 : KIMWOLF)
▲ 보스턴 마라톤 등 다수 마라톤 대회 완주한 '서브-3' 마라토너, 100㎞ 트레일 러너 ▲ 서핑 및 요트. 프리다이빙 등 액티비티 전문 사진·영상 제작자 ▲ 내셔널 지오그래픽·드라이브 기아·한겨레21·주간조선·행복의 가득한 집 등 잡지의 '아웃도어·러닝' 분야 자유기고가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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