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부도 일부 인정했는데 피해자 사망 후 '증거 불충분' 불송치
검사 보강증거 확보해 가해자 불구속 기소…유족 "딸 억울함 풀겠다"
(수원=연합뉴스) 이영주 기자 = "유림이가 죽고, 경찰도 사건을 불송치한다고 해서 모든 걸 포기한 심정이었어요. 그때 검찰에서 걸려 온 그 전화 한 통이 제게는 어둠 속 빛이나 다름없었어요."
고 방유림(사망 당시 26세)씨는 하수경(58)씨 두 딸 중 막내였다.
2024년 3월 18일 경기도의 한 반도체 부품회사 기계가공 엔지니어로 입사한 유림 씨는 "회사가 너무 좋다"고 했다.
그런 유림 씨 입에서 "직장에서 싸웠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하 씨는 "싸웠다"는 말이 폭행을 동반한 괴롭힘이라는 사실을 딸이 숨진 뒤에야 알게 됐다고 했다.
◇ 휴대전화에 남긴 '괴롭힘' 기록…회사·노동청 일부 인정
23일 유족 측이 연합뉴스에 제공한 유림 씨 휴대전화 카카오톡 대화창에는 날짜별로 회사에서 겪은 일이 기록돼 있었다.
"○○○이 오늘은 내 목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그냥 장난으로 하는 거 같은데 아팠고 기분이 나빴다."
"여러 가지 괴롭힘이 있었으나 지금 당장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참고 다니고 있다."
유림 씨의 카카오톡에는 직장 상사인 A씨로부터 욕설과 성희롱성 발언을 들었다며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대화도 다수 확인됐다.
A씨로부터 "왜 목젖이 있냐. 남자냐"라는 말을 들은 뒤, 목을 잡히기도 했다고 내용도 있었다.
회사는 유림 씨가 중부지방고용노동청 경기지청에 직장 내 괴롭힘·성희롱을 신고하자 조사를 벌였고, 10개 사안 중 4개만을 괴롭힘 또는 성희롱으로 인정하고 A씨에 대해 징계 조치했다.
회사가 괴롭힘으로 인정한 사례 중 하나는 "진정인(유림 씨)의 엉덩이를 발로 가격했다. '한손으로 위로 들어 올리면 들어 올려질까'하며 진정인의 목을 잡고 위로 올렸다"는 내용이었다.
노동청은 이런 회사의 조사 및 조치에 대해 "불합리하다고 볼 수 없다"며 '행정종결' 처분했다. 유림 씨 주장 전부는 아니었지만 노동청 역시 '직장 내 괴롭힘'이 있었음을 인정했던 셈이다.
유림 씨는 A씨를 상대로 민·형사상 소송도 제기했다.
◇ 피의자 거짓말탐지기 조사까지 했지만 결국 종결된 사건
그러나 유림 씨는 경찰에 고소장을 낸 지 약 두 달만인 2024년 12월 자신이 머물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림 씨는 카카오톡에 기록한 피해 내용, 지인들과의 대화 내용을 비롯해 노동청 신고 내용 등 그동안 모아온 증거들을 경찰에 제출했다.
경찰은 이들 사안 중 단 두 가지 사례를 혐의로 특정했고, 2024년 10월 25일 고소인 조사를 한차례 진행했다. 피고소인(피의자) 조사는 유림 씨가 사망하고 한 달이 2025년 2월 초에 이뤄졌다. 경찰은 이후 고소인의 사망을 알았다고 한다.
피의자의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거짓반응'이 나왔지만, 경찰은 고소인 사망으로 더 이상 수사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강제추행을 했느냐, 목을 잡은 적 있느냐"는 질문에 피의자는 모두 '아니오'라고 답했다고 한다.
경찰은 불송치 결정 전 피의자를 한 번 더 불러 조사하고, 유족으로부터 추가 자료를 제출받았지만, '피의자가 부인하고 목격자 및 CCTV 영상이 없는 점, 피해자의 진술 외 증거가 없다(증거불충분)'고 판단하고 2025년 3월 26일 사건을 종결했다.
하 씨는 "(딸이 죽고 나서) 경찰관으로부터 불송치한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한 번만 더 살펴봐달라고 부탁했지만, 경찰은 결국 사건을 끝냈다"며 "경찰의 안일함이 너무나도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불송치 결정 이후 고소인이 사망한 것은 아니고 수사 초기 단계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며 "고소인이 계속 (살아)있었다면 수사가 더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거짓말탐지기는 정황증거일 뿐이고, 제출된 기록을 다 검토하고 고려해 내린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 검찰 보완수사로 휴대전화 포렌식 등 보강증거 확보
유림 씨의 죽음과 함께 묻힐 뻔한 이 사건은 검찰로 넘어가면서 정반대의 국면을 맞이했다.
사건을 받은 검사가 다시 수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그때 유족 측의 불송치 이의신청이 제기됐고, 유림 씨 사건은 자동으로 검찰로 넘겨졌다.
황윤선 당시 수원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 검사(현 대검 검찰연구관)는 "기록을 보니 고소인 사망 전후로 경찰의 수사 흐름이 바뀐 게 보였다"며 "피의자를 조사하면서 고소인의 진술이 더 신빙성 있겠다고 생각했다. 피의자가 경찰에서 주장했던 내용과 검찰 조사에서의 내용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황 검사는 나아가 유족 면담과 고소인 휴대전화 포렌식을 거쳐 보강 증거를 확보했다. 유림 씨가 생을 마감하기 전 자살예방센터에서의 상담 내용도 확인했다.
검찰은 보완수사를 거쳐 A씨 혐의가 인정된다고 보고, 송치 3개월 만인 지난해 6월 27일 A씨를 강제추행 및 폭행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연합뉴스는 A씨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를 남기고 전화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는 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의 첫 재판은 다음 달 16일 수원지법에서 열린다.
하씨는 "내 딸이 생전에 '끝까지 하겠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 이 사건을 엄마인 내가 끝까지 해보려고 한다"며 "딸의 억울함을 이렇게라도 풀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young86@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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