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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을 깨는 첫 대사는 등장인물 중 1명인 ‘맹인’의 대사다. “북벽 장춘이라 했다”는 대사를 내뱉은 이는 현역 최고령 배우인 신구(90). 지팡이에 기댄 모습이지만, 그의 대사는 힘이 있고 묵직하다.
장진 연출의 신작 ‘불란서 금고: 북벽에 오를 자 누구더냐’가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놀(NOL) 서경스퀘어 스콘 1관에서 막을 올렸다. 장진 연출이 10년 만에 집필한 희곡을 직접 연출까지 맡은 작품이다. 장진 특유의 언어유희와 리듬감이 담긴 블랙 코미디다.
작품은 은행 지하의 비밀 금고를 둘러싸고 모인 다섯 인물의 숨 막히는 하룻밤을 그린다. ‘밤 12시, 모든 전기가 나가면 금고를 열 수 있다’는 단 하나의 규칙에 따라 모인 이들은 크고 작은 소동을 벌인다.
이번 공연에는 현역 최고령 배우인 신구가 전설적인 금고털이 기술자 ‘맹인’ 역을 맡았다. 그가 맡은 ‘맹인’은 인물 사이 갈등이 고조될 때마다 한 마디씩 툭 던지며 분위기를 환기시켜 웃음을 자아낸다. 과거 신구의 시트콤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반가운 순간이다.
신구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후배 배우들의 마음도 더욱 특별하다. ‘밀수’ 역을 맡은 배우 장영남은 “극의 첫 시작이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지만, 신기하게도 신구 선생님의 대사를 들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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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범죄를 실행하기 위해 만난 인물들의 심리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면서도 끊임없이 웃음을 만든다. 거들먹거리면서도 허당인 ‘건달’, 철저한 준비성을 갖춘 우수사원 ‘은행원’,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교수’, 전설 속 ‘해궁신유도’를 꿈꾸는 ‘밀수’ 등 캐릭터가 각자의 욕망을 드러내면서 관객은 이들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100분 내내 힘을 잃지 않는 배우들의 앙상블과 관계성도 인상적이다. 특히 처음 연극에 도전하는 주종혁과 금새록은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 당돌함과 패기를 보여주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번 공연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커튼콜’(막이 내린 뒤 관객이 환성과 박수로 출연자를 무대 앞으로 다시 불러내는 것)이다. 관객의 박수 속에서 후배 배우들의 예우를 받으며 밝은 얼굴로 화답하는 신구의 모습이 금고를 여는 일 자체를 행복하게 여기는 ‘맹인’의 얼굴과 겹쳐지면서 관객에게 짙은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공연은 5월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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