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날씨가 꾸물꾸물 심상치 않은데 벼는 다 벤 거야?"
"다 베긴요? 아직 갓골 논과 진너머 논이 남았어요. 이장님은 다 베셨어요?"
"다 베긴? 우리 것은 고사하고 베 주마고 약속한 동네 사람들 것도 아직 많이 남았지."
"이장님 노릇 하기 힘드시네요. 내 것보다 남의 것에 더 신경을 써야 하니."
"아, 이 사람아, 새마을지도자는 안 그런가? 자네도 동네 일 때문에 동분서주하지 않나?"
"그렇긴 하지요. 저도 부탁 받은 곳이 많아요. 더구나 마을회관 재건축 공사도 지지부진이라 여간 신경 쓰이고 바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네 혹시 지난번 농협 교양강좌 빵꾸 냈던 '나잘난'인지 '저잘난'인지 하는 소설가가 라디오에 나와서 떠들어대는 소리 들어봤어?"
"몰라요. 못 들었는데요.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 이야기로는 세 시간이나 늦게 왔다던데요."
"그랬다더군. 어떤 사람은 그 소설가가 끝까지 남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며 보내 준 자필 서명본 소설책을 가보처럼 보관하고 있다고도 하던데."
"아이구 이장님 어쩐대요? 이 기회에 가보 하나 늘릴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치셨네요."
"그런데 말이야. 그 소설가라는 작자가 라디오에서 뭐라고 씨부렁댔는지는 알아?"
"아니 이장님, 라디오를 들어봤어야 알지 어떻게 압니까? 그날 끝까지 남아 있다가 책까지 얻는 횡재를 한 부녀회장 말에 따르면 뭐 배려래나 하심(下心)이래나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갔다는데 혹시 그 이야기를 또 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구, 이장협의회에 갔다가 오는 차 안에서 우연찮게 들었는데 아 글쎄 그 작자가 우리 농협에 왔던 이야기를 하더라구. 여자 진행자가 묻는 말에 소설가 양반이 대답하는 형식인데 여러 물음 중에 휴대전화 이야기가 나왔어. 아마 방송국에서도 그 작자에게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나봐. 요즘 같은 시대에 휴대전화가 없어 불편하지 않으시냐는 물음에 불편한 것보다는 좋은 점이 더 많다더군."
"좋은 점이 뭐래요?"
"쓸데없는 소음에 시달리지 않아 좋구, 나 혼자만의 시간에 매달릴 수 있어서 좋구, 누가 죽었네 살았네 사돈에 팔촌까지 연락 오는 것 없어서 좋구, 온갖 광고 홍보성 문자나 전화에 정신 팔리지 않아서 행복하다는 것이지."
"아니 뭐 세상 살다보면 다 그런 것 아닌가요? 그런 거 저런 거 다 싫으면 혼자 산속에 들어가 토굴 속에 살면서 아예 나오질 말든가. 이야기 들어보니 그 사람 여기저기 갈 만한 곳에는 다 발 담그는 것 같던데요."
"하긴 우리 동네 농협 교양강좌에도 온 것을 보니 어디든 안 가겠어? 그런데 라디오에 나와 하는 말이 가관이야. 휴대전화가 없어 불편한 적이 있으셨냐는 물음에 답을 했는데 뭐랬는 줄 알아. 어느 단체에서 교양강좌 청탁이 와서 가기로 한 날 교통이 어찌나 막히던지 세 시간이나 지각을 했대. 그때 휴대전화가 있었다면 연락을 해서 너무 늦으니 강의를 취소하라든지, 죄송하지만 기다려 달라든지 했을 텐데 그러지를 못해 불편했대나. 막상 도착해 보니 참석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기다리지 못하고 가버리고 십여 명이 남아 있어 그분들에게 사과하고 나중에 책을 보내 주었노라고, 자리를 뜨지 않고 세 시간이나 기다려 준 수강생들이 진정한 배려심을 가진 분들이고 고마운 분들이라고."
"아니 이장님 뭐라고요? 남아 있던 사람들이 배려심을 가진 사람들! 그날 우리가 얼마나 발을 동동 구른 줄 아시잖아요? 농협 상무는 아침에 분명히 소설가의 집전화로 오늘 행사와 관련하여 통화를 했는데 휴대전화가 없어 몇 시간째 강사와 연락두절이라고 울상이었고, 만가을에 여기저기 논밭에 작물을 늘어놓은 농사꾼, 이장,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들은 결국 욕을 바가지로 쏟아놓고 자리를 떴고, 농사 걱정 없으니 제발 자리 좀 지켜 달라는 농협 상무의 애원을 저버리지 못한 읍내 사람들만 남아 삼삼오오 수다를 떨다가 강의 들은 것 아닙니까? 아니 자기가 그깟 휴대전화 하나 마련했으면 100여명이 넘는 농사꾼 촌놈들 헛고생 안 시켰잖아요? 휴대전화가 없으면 강의를 하러 다니지 말든가! 진정한 배려를 하려면 중간에 차에서 내려 공중전화로라도 알리든가!"
"내 말이! 세 시간이면 콤바인으로 스무 마지기 진너머 논 다 베어 놓고도 낮잠 한 시간은 자겠다. 하두 유명작가라구 하는 데다가 농협에서 하는 것이니 안 갈 수 없어 갔다가 시간만 허비했잖아?"
"맞아요. 유명 소설가님 시간은 금쪽이고 무지렁뱅이 농투성이들 시간은 깡마른 불알쪽인가요? 그러고도 라디오에 나와 그걸 자랑이라고 떠벌리고 있다니."
"왜 그 소설가라는 인간은 남은 사람만 생각하고 기다리다 지쳐 떠난 사람들에게는 배려를 안 했을까? 그럼 나도 그 알량한 소설책 가보 하나 생기는 것인데."
"아이구 이장님, 그런 가보 넘보지 마시구요 얼른 혼자 사시는 귀빼미 할머니네 벼나 빨리 베러 가세요."
☞하심(下心)=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을 뜻하는 불교 용어다.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태도로 상대를 대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여성경제신문 이진훈 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전 영동고 교사
mokleeyd@nate.com
☞미니픽션=아주 짧은 분량 속에 완결된 서사를 담아낸 초소형 소설을 말한다. '한 뼘 소설', '손바닥 소설(掌篇小說)', '플래시 픽션(Flash Fiction)'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설명은 생략하고 상징이나 묘사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끝맺는다. 짧은 틀 안에 소설적 재미와 철학을 압축해 놓은 '문학의 에스프레소'라고 할 수 있다.
이진훈 작가·교육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EBS와 고등학교에서 오랜 시간 국어와 논술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으로 <베이비 부머의 반타작 인생> 을 펴냈으며, 구상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사)K문화독립군 부회장 등 다양한 문화 단체에서 중책을 맡고 있다. 한양도성의 역사와 철학을 담은 저술 활동을 전개하면서 <한양도성 文史哲 순성놀이> 를 발간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례위원 경험을 바탕으로 <명절 차례와 기제사> 를 발간하는 등 전통문화 계승에도 힘쓰고 있다. 명절> 한양도성> 베이비>
*여성경제신문 기사는 기자 혹은 외부 필자가 작성 후 AI를 이용해 교정교열하고 문장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 중 AI로 생성한 이미지는 사진 캡션에 밝혀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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