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느 날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SNS에 떠도는 AI 프롬프트 중에 이런 게 있었다. “What is my curse? Don’t Explain(내게 내린 저주는 뭐야? 설명하지 마).” 내 친애하는 챗GPT가 보여준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You want everything, and you wait for permission(너는 모든 것을 원하고, 허락을 기다려).” 그간의 대화에서 유추한 결과라는 게 더 소름이었다. 생각은 많은데 시작하지 않은 것, 시작은 하고 싶은데 그 결과물이 우스꽝스러울까 봐 지레 포기하는 것,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니 당연히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것. 결과적으로 늘 그 자리인 것. 챗GPT와의 지난 대화를 스크롤해 보니 더 마음에 와닿았다. 이게 될까? 가능할까?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미지의 주체에게 계속 묻고 또 묻고 있었다. 허공에 쏟아 부은 질문은 메아리처럼 부유하다 이내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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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나는 누구에게 묻고 있었을까. 누구의 허락을 받으려 한 걸까. 버그에 걸린 게임 속 캐릭터처럼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버벅대고 있는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욕망’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욕망을 갖고 있게 마련이니까. 내가 생각하는 욕망은 ‘살아 있음’이다. 하지만 실재화하지 못하는 욕망은 한낱 꿈일 뿐이다. 영원한 꿈.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 코마 인간. 만일 내가 던진 수많은 질문이 나를 향한 거였다면, 나는 왜 나이면서 내가 보내는 메시지를 듣지 못했을까.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의문은 거기에서 시작됐다.
그즈음 독서 모임에서 읽게 된 책 한 권.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 출간한 지 30년이 넘었다지만, 독서 모임이 아니었다면 결코 읽지 않았을 책. 요약해서 말하면 진정한 자아와 만나는 방법을 알려주려는 책이다. 칼 융의 ‘동시성’ 이론을 좋아한다. 기묘하게도 그 순간의 나와 딱 맞아떨어지는 어떤 우연의 순간. 나는 이 책을 그렇게 만났다. 책이 안내하는 대로 6주에 걸쳐 천천히 읽었다. 주어지는 숙제도 성실하게 해냈다. 그중 특별히 효과가 있었던 두 개의 방법을 공유한다.
첫 번째는 ‘모닝 페이지’다. 준비물이 있다. 잠들기 전 침대맡에 노트와 펜, 조명을 놓아둘 것. 방법은 눈뜨자마자 쓰는 것이다. 눈뜨자마자 30분 정도 아무 말이나 쓴다. 비몽사몽 쓰는 글이라 글씨도 엉망, 문장도 엉망이다. 쓸 말이 없다면 쓸 말이 없다는 문장을 여러 번 써도 된다. 일기라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말 그대로 모닝 페이지다. 어떤 날은 정말 쓸 말이 없고, 어떤 날은 꿈 얘기로 시작한다. 어떤 날은 어제의 일을 쓰고, 어떤 날은 케케묵은 고민에 대한 답이 툭 튀어나온다. 어떤 날은 오늘의 결심이고, 어떤 날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쓴다. ‘쓰는’ 게 아니라 ‘쓰인다’는 게 마법 같은 지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내가 이 난제를 이토록 멋지게 풀어냈다고? 속는 셈치고 한번 시작해 보라. ‘나’로 인해 놀랄 일이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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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아티스트 데이트’다. 책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매주 한 번씩 관심 있는 무언가를 혼자 해보는 모험’. 내 경우 매주 일요일 저녁 다음 주중 스케줄을 잡는다. 서점에 가서 1시간 동안 아무 책이나 읽기, 가보고 싶었던 영화관에서 시간이 맞는 영화 랜덤으로 보기, 새로 생긴 상점에 들러 나만의 기념품 구입하기 등등.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오후 4시의 여우가 돼 그날을 기다린다. 한 번이라도 그 시간을 오롯이 보내고 나면 알게 된다.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 시간이었는지를. 그동안 나는 왜 이 짧은 시간도 허락하지 않고 살았는지를. 나와 데이트하는 날, 유독 예상치 못한 행운이 생기는 건 과연 우연일까?
MBTI의 P 성향이었던 나는 세 아이를 키우면서 J로 바뀌었다. 시간의 사물함을 만들고, 칸칸이 그날의 계획을 채우는 것이 얼마나 안정감을 주는지 몸으로 체득했다. 기상이나 식사, 준비물 챙기기, 등교, 등원, 하원, 간식 챙기기, 청소, 빨래, 설거지…. 루틴이 없으면 일상은 금세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유능한 엄마 모드로 열심히 체크리스트를 클리어했지만, 이상하게도 하루의 마지막은 텅 빈 느낌이 드는 때가 많았다. 해야 할 일은 분명 다 했는데, 기억할 만한 장면이 하나도 없는 하루랄까.
나에게 ‘모닝 페이지’와 ‘아티스트 데이트’라는 리추얼이 생기면서 내 하루는 더 단단해지고 있다. 루틴이 ‘기계적인 자동 반복’이라면 리추얼은 ‘의식적인 상태 전환’이다. 매일 눈뜨자마자 아이폰의 명상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튼다. 작은 불빛 아래서 모닝 페이지를 쓰고, 따뜻한 물로 샤워한다. 샤워 후 10분간의 명상. 맥 모닝보다 좋은 이 모닝 세트는 감사하게도 공짜다. 하루를 기분 좋게 지낼 수 있게 도와주는 특별한 메뉴다(다양한 시도 끝에 나만의 모닝 세트를 구성했다. 나에게 꼭 맞는 리추얼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매주 하루는 나와 데이트를 떠난다. 미지의 모험에 대한 기대감으로 일주일치의 설렘 에너지가 채워진다. 일상의 작동 방식을 조금 다르게 설계하는 것만으로 인생의 항로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중이다. 나는 누구인가.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아직도 나를 잘 모르겠다. 이제부터라도 친해지려고 한다.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려고 한다. 거기에 가장 큰 행복이 있다는 걸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다.
나정원
〈엘르〉 〈보그 걸〉 에디터를 거쳐 현재 프리랜서로 자유로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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