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일반적으로 술을 끓인다는 것은 양조의 상식에 철저히 어긋나는 일이다. 애써 발효시켜 만든 알코올에 열을 가해 증발시켜 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주는 막걸리를 거르고 남은 찌꺼기인 술지게미에 물을 붓고 생강, 대추, 계피, 배, 감초 같은 갖은 한약재를 넣어 오랜 시간 끓여낸다.
펄펄 끓는 가마솥 안에서 취기를 오르게 하는 알코올은 증기로 날아가고, 그 자리에 약재의 짙은 향과 곡물의 은은한 단맛이 녹아든다.
이 독특한 끓임의 미학 뒤에는 조선 왕실의 가장 비극적인 여인의 피눈물 나는 생존기가 숨어 있다.
조선 광해군 시절, 권력의 피바람이 불어 닥친 계축옥사로 인해 인목대비는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됐고, 그녀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사약을 받았다.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한 인목대비의 어머니, 광주 노씨 부인은 예순이 넘은 노구의 몸으로 가장 척박한 땅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왕실의 가장 높은 어른에서 하루아침에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역적으로 전락한 그녀 앞에는 혹독한 유배지의 현실과 자신을 따라온 여러 식솔의 주린 배가 놓여 있었다.
노씨 부인은 살아남기 위해 양반의 체면을 버리고 직접 술을 빚어 팔기 시작했다. 섬사람에게 막걸리를 팔고 남은 거친 술지게미마저 그냥 버릴 수가 없었다. 척박한 섬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를 긁어모아 술지게미와 함께 물에 넣고 푹푹 끓여 양을 늘렸다. 알코올은 날아갔지만, 곡물의 영양분과 한약재의 성분이 어우러져 한 끼 식사로도 손색없는 걸쭉하고 따뜻한 음료가 탄생했다.
당시 섬사람은 왕비의 어머니가 피눈물을 삼키며 끓여낸 이 슬픈 음료를 가리켜 '대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이라는 뜻의 '대비모주'(大妃母酒)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이는 자연스럽게 '모주'(母酒)가 됐다.
모주는 버려지는 찌꺼기조차 어떻게든 살려내어 여럿이 나누어 먹고자 물을 붓고 끓여낸 이타적이고 눈물겨운 생존의 술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한 여인이 가마솥 앞에서 장작불을 때며 끓어오르는 거품을 바라보았을 그 참담한 심정은, 역설적으로 가장 따뜻하고 영양가 높은 위로의 음료가 돼 민초의 주린 배를 채워줬다.
모주의 유래에는 또 다른 설도 존재한다. 술에 빠져 사는 아들의 건강이 걱정된 어머니가 아들의 쓰린 속을 달래주기 위해, 취하지 않으면서도 몸에 좋은 한약재를 듬뿍 넣어 막걸리를 끓여줬다는 이야기다.
어느 쪽이든 모주라는 두 글자 안에는 자식을 거두고 식솔을 먹여 살리려는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희생이 끓는 물처럼 녹아 있다. 이 때문에 모주는 예로부터 많은 주당의 쓰린 속을 가장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최고의 해장술로 사랑받아 왔다.
오늘날 모주의 명맥을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곳은 미식의 고장 전주다. 전주의 명물인 뜨끈한 콩나물국밥에 모주 한 잔을 곁들이는 것은 전주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국 식도락가들의 불문율과도 같다.
밤새 알코올로 시달린 위장을 콩나물의 아스파라긴산으로 달래고, 계피와 생강 향이 알싸하게 도는 달큰한 모주 한 모금으로 몸의 온기를 끌어올리는 완벽한 해장의 메커니즘이다.
알코올 도수가 1% 안팎이거나 아예 무알코올에 가깝기 때문에 아침에 마셔도 전혀 부담이 없고, 식후에 마시는 훌륭한 디저트 음료의 역할까지 해낸다.
다행스럽게도 이 따뜻한 위로의 맛을 이제는 전주까지 가지 않아도 시판 제품으로 쉽게 만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전주주조에서 생산하는 '전주모주'다. 전주식 모주의 정통성을 살려 생강, 대추, 감초, 인삼, 칡 등 8가지 한약재를 넣고 끓여내어 특유의 알싸하면서도 깊은 단맛을 훌륭하게 구현했다. 알코올 도수 1.5%의 저도주로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다.
그 외에도 남원 지리산허브영농조합, 술소리, 천년주가, 옥천주조장, 온모주 등등 많은 곳에서 모주를 만들고 있다.
술의 본질은 취함에 있다. 차가운 이성을 허물고 뜨거운 감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인류는 수천 년간 알코올이라는 매혹적인 물질을 빚어왔다. 하지만 우리 전통주 역사에는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의 쓰린 속을 달래주기 위해 알코올을 기꺼이 허공으로 날려버린 기막힌 술이 있다.
술이되 술이 아니고, 밥이 아니되 든든한 한 끼가 돼준 뜨겁고 달큰한 액체. 그 이름부터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어머니의 술, 모주(母酒)다.
전주한옥마을 등지에서는 무알코올로 끓여내어 남녀노소 누구나 전통 음료처럼 마실 수 있는 페트병 형태의 모주 제품도 다양하게 시판하며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최근에는 팩에 담아 따뜻하게 데워 마실 수 있는 형태의 모주도 출시돼 현대인의 지친 속을 달래주고 있다.
가장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재료인 술지게미로 피워낸 가장 따뜻한 맛. 우리는 모주 한 잔을 마실 때 그저 하나의 해장 음료를 들이켜는 것이 아니다. 혹독한 절망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 여인의 질긴 생명력을 마시고, 속 쓰린 아들을 위해 밤새 부뚜막에서 솥을 저었을 이 땅 모든 어머니의 온기를 마시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빠르고 차가운 시대, 잔에 담긴 짙은 갈색의 모주가 계피 향을 풍기며 따스하게 김을 피워 올린다. 그 달큰하고 묵직한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 우리는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잊고 살았던 오래된 위로와 피눈물 나는 역사의 훈기를 비로소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서양에 뱅쇼가 있다면 우리에겐 모주가 있다.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라, 깨어나고 치유하기 위해 마시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술, 그것이 바로 모주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seva@yna.co.kr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