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아 안녕! 우리 연락 안 한 지 진짜 오래된 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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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아 안녕! 우리 연락 안 한 지 진짜 오래된 거 알아?

엘르 2026-03-20 07:15:24 신고

수진아, 안녕! 진짜 오랜만이다. 벌써 입춘이래. 아침에 일어나서 도대체 이놈의 날씨는 언제쯤 누그러지냐고 짜증을 냈는데, 내가 또 성급했지 뭐야. 입춘 날 험한 말 하면 일 년이 재수없다던데 하루만 더 참을걸. 난 올해도 텄다, 텄어. 그나저나 넌 오늘 어떻게 보낼 거야? 아니, 어제는 어떻게 보냈어? 우리 연락 안 한 지 진짜 오래된 거 알아? 학교 다닐 땐 쪽지며 편지며 정말 많이 주고받았는데 세상에, 이게 웬일이니? 그때는 같은 동네에 살아서 일주일에 서너 번 넘게 만났는데도 그렇게 서로에게 편지를 써댔잖아. 기억 나? 모닝 글로리에서 예쁜 편지지 골라 색색의 펜으로 두세 장은 우습게 꽉꽉 채웠잖아. 그걸 또 어울리는 봉투에 담아 서로의 집 앞까지 걸어가 우편함에 넣어두고 그냥 돌아왔어. 나 지금 너네 집 앞이라는 말도, 편지 두고 간다는 말도 한 마디 없이. 네가 나중에 우연히 편지를 발견하면 얼마나 설레고 기분 좋을까 상상하며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다시 집까지 걸어왔어. 생각해 보니 그게 사랑이다, 얘. 다른 게 아니라 그게.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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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이 처음 나왔을 때가 2010년인가. 사실 나도 막 대학 졸업하고 그다지 어른도 아니었는데 그 신문물이 별로 마음에 안 들더라고. 낭만 다 죽인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나는 너와 나 사이의 여백이 좋았거든. 혹시 답장이 있을까 기대하며 며칠이고 우편함을 열어보는 그 빈 시간들이 좋았어. 근데 카톡은 그게 없더라고. 보내면 바로 읽히고, 또 곧장 답이 왔다고 알람이 울리고. 도대체가…. 몇 자 쓰자마자 내 손에서 탁 채어 가버렸다가 눈 깜짝할 새 돌아와서 빨리 읽으라고 전보를 흔들어 대는 느낌이랄까. 문자나 메일 같은 것보다 몇 배로 온종일 연결된 느낌을 주더라고. 심지어 실제로 대화하지 않는 순간조차 말이야. 그게 계속되니까 잠시 대화를 멈춘 순간이 오히려 불안한 거야. 무한했던 여백이 그저 텅 비고 끊긴 공백이 돼버린 거지. 너를 상상하고 미뤄 짐작할 여유를 주지 않는 상태가 나를 좀 안절부절못하게 만든 것 같기도 해. 누치오 오르디네가 그랬잖아. “존재의 범위 안에서 오직 인간만이 쓸모없는 행동을 한다”고. 나는 굳이 서로의 집까지 걸어가서 벨 한 번 누르지 않고 편지만 두고 돌아오는 그 불합리함과 비효율성을 아름답게 느꼈던 것 같아.


근데 사람이라는 게 결국 적응의 동물이라, 또 한참 지나니까 그것도 서서히, 아니 금방 익숙해지더라. 편의 앞에서 낭만 상실의 서운함 따위는 너무 무기력하더라고. 게다가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사회인이 되니까 너나 나나 눈앞의 삶에서 헤매고 구르느라 또 자연스럽게 서로 공란이 생겼잖아. 각자의 원이 조금씩 멀어져서 공집합은 점점 줄고 여집합은 커지는 때쯤 되니까 오히려 카카오톡이라는 게 있어서 고맙고 다행이었어. 그거라도 없었다면 더 이상 그 동네에 살지 않는 내가, 펜이라고는 영수증에 사인할 때만 잡는 내가, 엄마 아빠도 드문드문 보는 내가 어떻게 너와 계속 연결될 수 있었겠니. 그토록 가늘고 희미하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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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요즘 나는 어느 때보다 희미해진 우리 관계 속에서 너를 떠올리는 시간이 많아졌어. 계속 그 회사를 다니고 있을까? 계획대로 독립했을까? 그 남자랑 계속 만날까? 혹시 결혼이라도 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가장 궁금한 건 ‘너도 가끔 나를 생각할까’겠지.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날을 네가 후회할지, 오직 그것만 궁금했어. 쏘아붙인 날 선 말들을 취소하고 싶지는 않은지, 아무렇지 않게 내 차에서 내리던 순간을 아쉬워하진 않았을지 말이야. 불 같던 원망이 수그러들고 내가 잘못했던 순간을 뒤늦게 떠올린 후에는 모든 의미 있는 날에 네 생각이 났어. 혹시 생일에 내 연락을 기다리지는 않았니? 크리스마스에 연락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어? 나는 몇 번이나 카톡에 들어가 네 이름을 검색해 보고, 텅 빈 네 프로필 화면을 들여다봤다가, 그중 몇 번은 용기 내 대화창에 들어갔다가 마지막 순간에 또 울컥 솟구치는 못난 자존심에 결국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나왔어. 너는 그런 내 모습을 상상이나 해봤을까?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멀어졌을까? 사실 싸운 게 처음은 아니잖아. 중학생 때도 남들 다 구경하는 학교 복도에서 싸우고, 회사에서도 일은 제쳐 놓고 메신저로 싸우다 분을 못이겨 계단에서, 탕비실에서, 전화로 한바탕하고 그랬잖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고, 헤어지기 직전의 연인 같은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우린 헤어지지 않았잖아. 그래서 지금도 궁금해. 그 모든 지난날의 웃기는 순간보다 그날이 결코 더 무겁지 않았는데,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고, 그저 시절 인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우리 시절은 너무 길지 않았니? 내 인생의 반이, 네 인생의 반이 그저 한 시절이라면 삶은 정말 웃기지도 않은 말장난일 거야.


누군가 살아 있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사이와 죽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더라. 나는 그 의문에 도시(Dosii)의 ‘너의궤도’라는 뮤직비디오가 떠올랐어. 3분 55초 동안 〈기동전사 건담〉의 마지막 장면이 루프로 계속 반복돼. 주인공은 격렬한 마지막 전투 중 연인을 우주에서 잃어버렸어. 모든 장비가 먹통이 된 상태에서 사라진 연인을 무한한 우주에서 찾아 헤매다 절망에 빠져.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그녀가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다가 떠올려. 서로를 향한 고동은 어둠에서도 감각을 열고 서로를 당긴다는 걸. 그리고 마침내 주인공은 기적같이 연인을 발견하고 꼭 끌어안는 거야. 수진아, 나는 우리가 우주에서 잠시 표류 중인 상태라고 생각해. 너도나도 서로에게 주파수를 보내고 있어서 그게 맞아떨어질 때 오늘처럼 문득 네 생각이 드는 거야. 드문드문한 전파의 기록이 쌓이면 언젠가 누구든지 용기를 내 우연을 만들 거야. ‘너의궤도’ 가사처럼 “넌 나의 모든 걸 가진 채로 말야 날 부르고 있어 저기 저 먼 곳에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선 아무 일도 없듯이 아무 일도 없듯이”. 맞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날 풀리겠지. 감기 조심하고, 잘 지내고 있어! 고맙고, 미안해. 사랑해.



에리카

여성 전용 헬스장 ‘샤크짐’ 공동대표. 사무직 직장인으로 살다가 30대에 완전한 ‘운동인’으로 각성했다. 〈떼인 근력 찾아드립니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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