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주권정부의 민낯? 'No'라고 말하지 못한 실용외교, 기회주의의 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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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권정부의 민낯? 'No'라고 말하지 못한 실용외교, 기회주의의 전형

프레시안 2026-03-19 14:59:02 신고

트럼프가 트루스소셜에 "우리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WE DO NOT NEED THE HELP OF ANYONE!)"고 썼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는 또 다른 글을 올렸다. "이란 테러 정권의 잔재를 끝장내고, 그 해협을 이용하는 나라들이 알아서 책임지게 하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의 무반응한 동맹국들도 빠르게 움직이겠지!" 파병 논란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판이 바뀌었을 뿐이다.

트럼프가 영국·프랑스·중국·일본·한국 등에 호르무즈 해협 안전 확보 지원을 요구했을 때 주요국들은 즉각 호응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교전 중 군사작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고, 영국도 더 넓은 전쟁에 끌려들지 않겠다고 했다. 일본도 독자 판단을 내세우며 거리를 두었다. 다른 동맹국들 역시 함정을 곧바로 보내는 흐름을 보이지 않았다. 압박은 있었지만 동참은 자동으로 따라오지 않았다.

일본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다카이치 총리는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국회에 나와 "현시점에서 자위대 파견은 예정하고 있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법률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겠다"고 했다. 완전한 거부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법과 원칙의 경계는 먼저 제시한 셈이다.

반면 한국 정부는 공식 요청 여부와 검토 절차만 반복하며 끝내 원칙을 먼저 말하지 못했다. 대통령실은 "한미 간 충분한 시간을 갖고 논의한 뒤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며 신중론을 유지했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도 "미국으로부터 공식 파병 요청을 받은 바 없다", "SNS 메시지는 공식 요청으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난하고 모호한 답변이다.

외교적 수사로는 무리가 없을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본질을 비켜간 말이다. 동맹을 의식한 신중함이 아니라, 원칙을 먼저 말할 용기의 부재다. 트럼프가 국가명을 직접 지목하며 공개 압박을 가했는데도, 공식 채널이 아니라는 이유로 원칙 표명을 미루는 것은 신중함이 아니라 회피에 가깝다. 공개 요구에는 공개 원칙으로 답하는 것이 정상이다.

문제는 요청 형식이 아니었다. 미국의 압박이 살아 있을 때 한국 정부가 스스로의 기준을 밝힐 의지가 있었느냐가 핵심이었다.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 혁명수비대의 드론, 미사일, 기뢰 위협에 노출된 위험한 공간이다. 우리 청년들을 사지로 내몰 수 있는 사안 앞에서 국민주권정부를 자처한 정부가 끝내 No를 말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신중함이 아니라 주체성의 결여다. 판단을 유예한 것이 아니라 책임을 유예한 것에 더 가깝다.

일부에서는 "눈치를 보다가 적당한 시기에 많은 국가들의 결정에 묻어가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정부의 대응은 그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의 요구가 살아 있을 때는 침묵했고, 다른 나라들이 먼저 거리를 둔 뒤에도 원칙을 밝히지 않았다. 트럼프가 스스로 "도움은 필요 없다"고 돌아서자, 마치 처음부터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대응해 온 것처럼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를 얻게 됐다. 결과가 정리된 뒤에 편승하는 기회주의 외교의 전형이다. 거절의 부담은 피하고, 불참의 결과만 챙긴 셈이다.

그러나 안도는 이르다. 트럼프는 곧이어 또 다른 게시글을 올렸다. 이란을 더 강하게 공격하고, 호르무즈 해협의 부담은 그 해협을 이용하는 나라들이 책임지게 하면 "무반응한 동맹국들"도 움직일 것이라는 식이었다. 파병 요구를 철회한 것이 아니었다. 압박의 방식을 바꾼 것이다. "도와달라"에서 "네가 알아서 하라"로, 요청에서 강요로, 협의에서 떠넘기기로 이동한 셈이다.

한국처럼 원유 수입의 상당 부분을 호르무즈 해협에 의존하는 나라에는 더 직접적인 압박이다. 침묵으로 시간을 버는 방식이 통했던 국면이 지나가면, 다음에는 더 거센 비용 청구가 돌아올 수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실용이라고 부를지 모른다. 먼저 거절해 마찰을 키우지 않고 판세를 지켜보다가 결과적으로 피해를 줄였으니 잘한 것 아니냐는 논리다. 그러나 타국이 먼저 거리를 두고 미국이 한발 물러선 뒤에야 결과를 누리는 외교는 실용이 아니다. 원칙 없는 편승이다. 그런 방식이 반복되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압박이 사라져야 비로소 입장을 정하는 나라로 굳어진다. 신중하다는 평판이 아니라, 끝까지 말하지 못하는 나라라는 인식이 남는다.

지금 한국 외교에 필요한 것은 No라고 말하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이 아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전략적 자율성이다. 압박 앞에서 침묵하고 판세가 정리되면 결과를 누리는 방식은 자율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종속이다. 강대국 사이에서 진정한 외교적 주체로 서려면, 불리한 상황에서도 먼저 원칙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트럼프가 요구를 철회하지 않았다면 이재명 정부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정부는 끝내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번 사태의 핵심이다.

원칙 있는 외교는 결과가 유리할 때가 아니라 결과가 불확실할 때 드러난다. 국민주권정부가 정말 그 원칙을 가지고 있는지, 이번 호르무즈 사태는 냉정한 물음표를 남겼다. 트럼프의 새 게시글은 그 물음표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도움이 필요 없다"고 했다가, 곧이어 "해협은 너희가 책임지라"는 식으로 압박의 방향을 틀었다. 트럼프의 SNS는 외교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다음번 압박이 올 때, 한국 정부에게 다시 손쉬운 출구가 열리리라는 보장은 없다.

▲강훈식 비서실장 등이 1월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에 참석해 있다. 앞줄 왼쪽부터 강훈식 비서실장,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김용범 정책실장, 홍익표 정무수석, 이규연 홍보소통수석, 조성주 인사수석, 전성환 경청통합수석비서관, 봉욱 민정수석.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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