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거실 테이블. 당신이 그의 핸드폰에서 다른 사람과 은밀하게 주고받은 메시지를 발견하고 따져 물은 참이다. 그의 잘못이고, 당신은 배신감에 몸을 떨며 해명을 요구한다.
- - “이게 다 뭐야?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황하며 변명하거나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 할 타이밍이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서늘할 정도로 차분하다. 핸드폰을 툭 내려놓더니 당신을 빤히 응시한다.
- - “넌 내 핸드폰을 몰래 볼 만큼 날 못 믿어? 내가 요즘 회사 일 때문에 얼마나 숨 막히는지 알면서 나를 이렇게 감시해?”
순식간에 대화의 초점이 이동한다. 메시지의 내용은 증발하고, 핸드폰을 몰래 본 당신의 행동과 그를 믿지 못한 태도만 프레임 안에 잡힌다. 당신은 말문이 막힌다. 분명 내가 따지고 있었는데, 왜 내가 해명하는 쪽이 되어 있지?
초점 흐리기라는 렌즈 교체
내현성 나르시시스트는 갈등이 터졌을 때 카메라의 렌즈를 아예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순간, 상황의 본질을 흐리고 상대방의 사소한 흠집을 찾아내 그곳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에게 잘못의 경중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비난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한다. 잘못을 인정하면 자기 안의 무언가가 깨지는 기분이 드는 사람들이다.
그 감각이 너무 싫으니까,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돌린다. 생각해서 하는 게 아니다. 거의 본능이다. 자신이 찍히는 순간, 손이 먼저 렌즈를 돌려놓는다.
그래서 가장 손쉬운 대상인 당신의 감정 반응이나 행동 방식을 문제 삼는다.
- - “네가 평소에 숨 막히게 구니까 나도 사람 좀 만나고 싶었던 거야.”
이 한마디로 카메라는 당신을 향한다. 그의 외도나 거짓말은 ‘당신의 집착이 불러온 어쩔 수 없는 일탈’로 각색된다. 피해자인 당신이 졸지에 그를 몰아세운 가해자가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게 있다. 이 렌즈 교체에는 패턴이 있다. 어떤 상황이든 카메라가 돌아가는 방향은 거의 정해져 있다.
하나는 당신의 ‘태도’다.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대화가 안 되는 거야.” 뭘 말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했느냐를 문제 삼는다. 당신의 목소리가 조금만 커져도, 표정이 조금만 굳어도, 그게 새로운 피사체가 된다. 내용은 사라지고 태도만 남는다.
다른 하나는 당신의 ‘과거’다. “너도 지난번에 그랬잖아.” 지금 이 순간의 잘못과 전혀 관계없는, 며칠 전, 몇 달 전의 당신의 실수를 끌어온다. 프레임 안에 오래된 사진을 슬쩍 끼워 넣는 거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 이 사람의 잘못을 따지면서, 동시에 자기 과거까지 해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초점이 두 개가 되면 어느 쪽도 선명하지 않다. 흐려지는 거다. 그가 원하는 게 바로 그 흐려짐이다.
분명 화를 내러 왔는데
분명 화를 내러 왔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그를 옥죈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이 전환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당신도 모른다. 대화가 시작된 지 5분도 안 됐는데, 이미 주제가 바뀌어 있다.
억울함에 목소리가 커지면 그는 기다렸다는 듯 셔터를 누른다.
- - “이것 봐, 또 소리 지르고 흥분하지. 너랑은 대화가 안 돼.”
이 말이 나오는 타이밍을 잘 봐야 한다. 당신의 감정이 가장 격해진 순간이다.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 눈물이 맺히고, 억울해서 말이 빨라지는 그 순간. 그때 셔터를 누른다.
왜냐면 그 순간의 당신이 가장 ‘감정적인 사람’처럼 보이니까. 옆에서 누가 보면 혼자 흥분해서 소리 지르는 여자와, 팔짱 끼고 냉정하게 앉아 있는 남자. 그 구도가 만들어지는 거다.
이 사람은 일부러 차분하게 구는 거다. 당신이 격앙될수록 자기는 더 느리게, 더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둘 사이의 온도 차이를 벌려놓는다.
그래야 프레임이 완성되니까. ‘이성적인 나’와 ‘감정적인 너’. 그 프레임 안에서 누가 문제인 사람처럼 보이겠나.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사람은 당신이 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다린다. 당신이 울면 게임이 끝나기 때문이다. 눈물이 나는 순간, 당신은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완전히 갇힌다.
그 뒤로는 어떤 말을 해도 “너 지금 흥분한 상태잖아, 나중에 얘기하자”로 대화를 접을 수 있다. 렌즈 교체가 아니라, 아예 촬영 종료다.
왜곡된 프레임 안에 갇히다
카메라 렌즈가 당신을 향해 고정되면, 스스로를 그 프레임 안에서 검열하기 시작한다.
- -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 - ‘핸드폰을 본 건 내 잘못이 맞잖아.’
자신의 감정은 뒤로 밀어둔 채, 그가 지적한 흠집만 들여다본다. 그가 찍어낸 왜곡된 사진 속의 당신은 의심 많고, 감정적이며, 피곤한 사람이다.
이게 한두 번이면 “기분 나쁘긴 한데 넘어가자” 하고 끝난다. 문제는 이 프레임이 매번 같은 구도로 반복된다는 거다. 싸움의 원인은 매번 다른데, 끝나는 방식은 항상 같다. 그의 잘못으로 시작된 대화가 당신의 사과로 끝난다.
- - “핸드폰 본 건 미안해. 내가 널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 사과를 하는 순간의 당신의 속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억울하다. 내가 왜 사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근데 이 대화를 더 이어가는 게 너무 지친다.
이 사람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려면 또 한 시간은 싸워야 한다. 그 한 시간 동안 나는 또 소리를 지를 거고, 또 울 거고, 그러면 또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 된다. 차라리 내가 한 발 물러서는 게 빠르다.
그래서 사과한다. 진심이 아닌 사과를. 그게 이 상황을 끝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
그가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 당신은 프레임 안에서 나쁜 사람이 되어 있고, 그는 렌즈 바깥에서 깨끗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 패턴이 수십 번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 당신은 싸우기 전에 미리 진다. 서운한 일이 생겨도 입을 열기 전에 먼저 계산한다. ‘이걸 말하면 또 내 태도가 문제가 되겠지.’ ‘또 내가 예민한 사람이 되겠지.’ ‘또 내가 사과하게 되겠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결과가 보이니까, 그냥 참는다. 속으로 삼킨다.
이게 그가 원하는 최종 결과다. 당신이 아예 카메라 앞에 서지 않는 것. 불만을 말하지 않는 것. 자기 감정을 스스로 검열해서 꺼내지 않는 것.
렌즈가 돌아간 게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프레임 밖으로 자신을 지워버리는 것. 그가 렌즈를 돌릴 필요조차 없어진다. 당신이 알아서 사라지니까.
렌즈가 돌아갈 때
상대방이 렌즈를 돌릴 때 그 흐름에 끌려가면 당신만 계속 찍힌다. “핸드폰을 본 건 내 잘못이지만, 이 메시지는 어떻게 설명할 거야?”라며 초점을 다시 맞추려 해도 소용없다.
그는 또 다른 흠집을 찾아내 렌즈를 돌린다. 한 번 돌리는 사람은 계속 돌린다. 이번에 참아준다고 다음에 안 돌리는 게 아니다.
잘못을 지적했을 때 태도를 문제 삼으며 빠져나가려는 사람과는 대화가 안 된다. 초점이 어긋난 대화는 멈추는 게 맞다.
- - “내 태도를 문제 삼고 싶으면 이 일부터 먼저 해명해. 말을 돌리지 마.”
이 말을 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이미 수십 번의 프레임에 갇혀본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두렵다. 또 뒤집힐까 봐. 또 내가 나쁜 사람이 될까 봐. 그 두려움은 진짜다. 오래 훈련된 거니까.
그런데 한 가지만 생각해 보자. 렌즈가 돌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최악의 상황이 뭔가. 그가 화를 낸다. 대화를 거부한다. 며칠 연락을 끊는다. 지금도 겪고 있는 일이다. 달라지는 건 없다. 다만 이번에는 당신이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 그 하나가 다르다.
그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지 않고 렌즈만 돌려댄다면, 왜곡된 프레임 안에서 억울한 얼굴을 지어줄 필요 없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렌즈 밖으로 걸어 나오면 된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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