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퇴직연금 시장의 무게중심이 달라지고 있다. 적립기 수익률에 맞춰졌던 관심이 은퇴 이후 인출 설계로 옮겨가는 흐름이다. 자산을 얼마나 불릴지에 초점을 맞췄던 기존 틀에서 벗어나, 연금 개시 이후 이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오래 나눠 받을지까지 고려하는 이른바 ‘보험식 리모델링’이 힘을 얻고 있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은 496조8000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퇴직연금 시장이 500조원 돌파를 목전에 두면서 금융권의 판도도 빠르게 바뀌는 양상이다. 그동안 적립기 수익률과 자산 확대에 쏠렸던 시선은 이제 은퇴 이후 자산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인출하고, 이를 장기간 현금흐름으로 연결할 것인지로 옮겨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개인형퇴직연금(IRP) 시장에서도 이런 변화가 두드러진다. 2024년 10월 도입된 퇴직연금 실물이전 서비스와 장기 연금수령에 대한 세제 유인이 맞물리면서 가입자들의 선택 기준도 달라지고 있어서다. 단순히 자산을 얼마나 불릴 수 있느냐를 넘어, 운용한 자산을 은퇴 이후 어떤 방식으로 수령해 생활자금 흐름으로 이어갈 수 있느냐가 핵심 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쌓는 경쟁 끝나자…이젠 ‘어떻게 나눠 받을까’
그동안 퇴직연금 시장은 증권사를 중심으로 ETF·펀드 등 실적배당형 상품 경쟁이 두드러졌다. 은행은 예금 중심의 안정성을, 보험사는 원리금보장형과 실적배당형을 병행하며 시장에 대응해 왔다. 그러나 경쟁의 중심에는 결국 적립 기간 동안의 운용 성과와 수익률이 자리해 있었다.
하지만 은퇴 시점이 가까워질수록 가입자의 관심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적립기에는 자산 증식이 중요하지만, 수령기에는 매달 얼마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지가 더 현실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이 더 이상 ‘쌓는 금융’에만 머무르지 않고, 은퇴 이후 삶을 지탱하는 ‘현금흐름 금융’으로 역할을 넓혀가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 같은 흐름에 속도를 붙인 것은 실물이전 서비스와 세제 개편이다. 서비스 도입 후 3개월 만에 약 2조4000억원 규모의 자산이 이동하면서 가입자들은 기존 사업자에 머무르기보다 상품 구조와 서비스 경쟁력을 비교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퇴직소득을 20년 초과해 연금으로 수령할 경우 감면율이 기존 40%에서 50%로 확대되면서, 장기 수령형 상품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사업자 변경의 문턱이 낮아지고 장기 수령 유인까지 강화되자, 금융사들도 적립 단계의 성과를 넘어 인출 시점의 설계 역량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상품 이전의 제약이 줄어들면서 고객이 사업자를 바꾸더라도 기존 운용 전략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는 수익률뿐 아니라 인출 기간, 지급 방식, 세제 효과까지 아우르는 종합 설계 역량이 사업자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험이 잘하는 것…‘보증’ 입힌 인출형 상품 등장
주요 생명보험사들도 이런 변화에 맞춰 퇴직연금 전략의 무게중심을 조금씩 조정하는 분위기다. 과거에는 원리금보장형 중심으로 안정성을 강조하거나 적립 단계의 자산 유치에 초점을 맞췄다면, 최근에는 연금 개시 이후 현금흐름의 예측 가능성과 장기 수령 구조를 함께 제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주요 생보사들이 종신연금형이나 연금전환특약 등을 통해 연금 수령 구조와 보증 기능을 제공해온 가운데, 미래에셋생명의 ‘보증형 실적배당보험’은 결이 다른 사례로 꼽힌다. IRP 안에서 실적배당 운용과 20년 정액 지급 보증을 결합한 업계 최초 상품이기 때문이다. 운용수익이 남을 경우 지급 기간이 늘어나는 구조까지 더해, 적립 이후 인출 설계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해당 상품은 출시 9개월 만에 판매액 500억원을 돌파했고, 올해 1~2월에만 180억원이 유입됐다. 해당 상품은 50세 이상 고객이 IRP 계좌를 통해 가입할 경우 납입 원금 기준 240개월(20년) 동안 정액 지급을 보증하는 구조다. 일임형 자산배분펀드를 활용한 글로벌 분산투자 전략을 적용해 운용수익으로 적립금이 남아 있을 경우, 적립금이 소진될 때까지 연금액을 계속 지급하도록 설계됐다.
시장에서는 이 같은 구조를 수익률 경쟁을 넘어 은퇴 이후 자금의 배분과 수령 방식까지 겨루는 퇴직연금 시장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본다. 높은 수익률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은퇴 이후 장기간에 걸쳐 자금을 어떻게 배분하고 수령하게 할 것인지까지 포함한 종합 설계 능력이 상품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많이 준다고 끝 아니다…길게 보장할 체력도 관건
다만 장기 지급을 보증하는 구조가 확산할수록 보험사에는 더 높은 수준의 리스크 관리 역량이 요구된다. 장기간 확정 지급을 유지하려면 시장 변동성 속에서도 약속한 지급 재원을 안정적으로 맞출 수 있는 운용 능력과 헤지 전략, 자본 관리 체계가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이다. 상품 구조에 따라 기업회계기준(IFRS17) 관련 부담이나 건전성 측면의 변수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입자 입장에서도 보증 조건과 수익 반영 방식, 중도 해지 시 제약 등을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겉으로는 안정적인 인출 구조로 보이더라도 세부 설계에 따라 실제 수령 방식과 체감 수익은 달라질 수 있어서다. 장기 인출형 상품일수록 ‘보장된 현금흐름’과 ‘투자 유연성’ 사이의 균형을 얼마나 정교하게 구현했는지가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퇴직연금 시장이 커질수록 누가 자산을 더 많이 적립하게 하느냐보다, 누가 은퇴 이후 자금을 더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나눠 쓸 수 있도록 설계하느냐가 더 중요해질 것”이라며 “주요 생보사들도 기존 적립 경쟁에서 나아가 인출 구조와 보증 기능을 앞세운 차별화에 속도를 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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