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드] 정부가 미국과 이란 간 전쟁으로 촉발된 중동 정세 불안과 국제 유가 급등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 단위 ‘차량 부제 운행’ 검토에 착수했다. 민간까지 포함한 강제 부제가 실제 시행될 경우 1991년 걸프전 당시 두 달간 시행된 10부제 이후 35년 만의 조치가 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1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에너지 절약 노력을 범사회적으로 확산해야 한다”며 “필요하면 자동차 5부제 혹은 10부제 등 다각도의 에너지 수요 절감 대책을 수립해달라”고 지시했다. 미국·이란 전쟁 장기화 가능성을 전제로 에너지 수요 억제에 방점을 찍은 발언이다.
대통령 발언 직후 기후에너지환경부(기후부)는 구체적 방안 마련을 위한 검토에 들어갔다. 기후부 관계자는 “부제를 실시했을 때 ‘필요한 만큼 최소한’ 실시될 수 있도록 하는 범위와 시기 등을 검토 중”이라며 “상황을 보면서 구체적인 방안을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공공부문에 한정할지, 민간까지 확대할지, 권고 수준에 그칠지, 과태료를 수반하는 의무제로 갈지 등 핵심 쟁점은 모두 ‘백지 상태’라는 설명이다.
법적 근거는 이미 마련돼 있다. 정부에 따르면 에너지 사용량 감축을 위한 차량 부제는 ‘에너지이용합리화법’ 제7조·제8조에 근거해 시행할 수 있다. 동법 7조 2항은 기후부 장관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국내외 에너지 사정 변동으로 에너지 수급에 중대한 차질이 발생하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할 경우 에너지 수급 안정을 위해 에너지 사용 기자재 소유·관리자에게 사용 제한을 명령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차량도 포함된다.
또 8조는 국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에 에너지 효율적 이용과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조치를 의무화하고 있고, 이에 근거한 ‘공공기관 에너지이용 합리화 추진에 관한 규정’에는 공공기관의 승용차 요일제 의무 시행 조항이 담겨 있다. 현재도 공공기관 임직원 차량을 대상으로 요일제가 운영되고 있지만, 위반 시 부설 주차장 이용 제한 정도에 그쳐 실질적 강제력은 미미한 상태다.
전국 단위 차량 부제 운행은 과거 유가 급등기마다 동원된 대표적 에너지 절감 수단이었다. 1970년대 석유 파동 당시 정부는 구급차·취재차·외국인 차량을 제외한 8기통 이상 고급 승용차 운행을 금지하고, 공휴일에는 승용차 운행을 전면 제한했다. 이후 1990년 걸프전 발발로 유가가 급등하자 1991년 약 두 달간 ‘페르시아만 사태 대비 교통부문 대책’의 일환으로 전국 10부제가 시행됐다.
당시 10부제는 자동차관리법에 근거해 실시됐다. 자동차관리법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대기오염 방지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유가 있을 때 국토교통부 장관이 경찰청장과 협의해 자동차 운행 제한을 명령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1991년 제도는 일부 특수차량을 제외한 모든 승용차와 전세·관광버스, 관용·자가용 버스를 대상으로 했고, 위반 시 1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시내버스·택시·화물트럭·구급차·경찰차·소방차·우편수송차·외교관 차량·언론기관 차량·장애인 차량 등은 예외로 뒀다. 민관을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강제 부제가 적용된 것은 이때가 유일한 사례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도 ‘홀짝제’로 불린 2부제 도입이 논의됐지만, 최종적으로는 시행되지 않았다. 이후 2006년 ‘신고유가 시대’ 에너지 소비 억제 대책의 1단계 조치로 공공기관 승용차 요일제가 도입됐고, 2단계에는 공공부문 2부제와 민간 승용차 요일제, 3단계에는 민간 승용차 2부제와 석유 배급제까지 포함된 로드맵이 마련됐으나 실제로 2·3단계까지 올라간 적은 없다.
에너지 절감과 별도로도 차량 부제는 교통 혼잡 완화 수단으로 간헐적으로 활용돼 왔다. 1995년 성수대교 붕괴 이후 서울에서 10부제가 시행됐고, 1997년 동아시아경기대회, 2000년 아셈(ASEM) 회의, 2002년 월드컵 등 국제행사 기간에도 일부 지역에서 한시적으로 운행 제한이 이뤄졌다. 최근에는 초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가 발령되면 행정·공공기관 차량을 대상으로 2부제가 시행된다. 이 경우에도 ‘장거리 출퇴근 차량’, ‘임산부·장애인·유아 동승 차량’, ‘비상저감조치 대응 차량’, ‘대중교통 접근성 열악 지역 차량’ 등은 사전 등록 시 부제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
문제는 차량 부제가 실제로 에너지 사용량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는 점이다. 정부 내부에서도 실효성에 대한 회의론이 적지 않다. 공공기관 요일제의 경우 이미 강제력이 약해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별다른 불이익이 없는 상황이고, 민간까지 확대할 경우에는 과태료 등 실질적 제재를 부과해야 하지만 정치·사회적 부담이 상당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민간 차량 운행 제한이 에너지 절감 효과를 내려면 예외를 최소화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예외를 대폭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출퇴근·영업·돌봄·의료 등 ‘반드시 차량을 써야 하는’ 사유가 다양해 예외를 좁히기 어렵고, 예외가 많아질수록 시민 불편만 커지고 에너지 절감 효과는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은행이 이날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이란 갈등 심화로 국제 유가가 오르면서 2월 수입물가지수(원화 기준, 잠정치)는 145.39로 전월보다 1.1% 상승했다. 지난해 7월 이후 8개월 연속 오름세로, 정부가 에너지 수요 관리 대책을 서두르는 배경이 되고 있다.
정부는 향후 중동 정세, 국제 유가 흐름, 국내 에너지 수급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부제 도입 여부와 방식, 적용 범위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기후부 관계자는 “아직 시행 여부 자체도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며 “에너지 수급 상황과 국민 불편, 실효성을 함께 따져 최소한의 조치가 될 수 있도록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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