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미에: 욕망과 파멸의 아이콘 '토미에', 죽어도 증식하는 아름다운 괴물에 홀린 인간의 잔혹한 에로티시즘.
- 소용돌이: 일상의 패턴이 재난이 되는 기하학적 호러의 정점, 온 마을을 집어삼킨 소용돌이의 집요한 저주.
- 공포의 물고기: 페이지를 뚫고 나오는 악취와 점액질의 촉감, 오감을 자극하는 기괴한 생명체의 습격과 바디 호러
- 이토 준지 자선 걸작집: '목매는 기구' 등 짧고 강렬한 단편의 미학, 단 몇 장의 그림으로 완성하는 압도적 비주얼 쇼크.
좋은 호러는 여운이 길어야 한다. 이토 준지는 바로 그 방면에서 독보적이다. 1987년 프로 데뷔 이후 토미에, 소용돌이, 공포의 물고기 같은 장편과 수많은 단편집으로 현대 호러 만화의 문법을 다시 썼고, 미국 아이즈너상 4회 수상에 이어 2025년 아이즈너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다. 기안84와의 만남으로 다시 화제가 된 이토 준지의 대표작을 추렸다. 이토 준지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권하는 4권이다.
1. 이토 준지의 모든 것 〈토미에〉
이토 준지 하면 토미에가 바로 떠오른다. / 출처: 시공사
가장 먼저 집어야 할 책은 역시 토미에다. 토미에는 1986년 응모작으로 주목받은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다. 토미에 시리즈는 1986년부터 2000년까지 이어진 20편의 이야기로 구성됐다. 토미에는 한 캐릭터의 장수 시리즈이면서 동시에, 이토 준지의 초기 감각이 가장 집요하게 축적된 기록이다. 토미에가 이토 준지의 대표작으로 첫 손에 꼽히는 이유는 공포의 재료가 너무 선명해서다. 긴 흑발, 왼쪽 눈 아래 점, 사람을 홀리는 얼굴. 이 아름다움은 감상의 대상이자 동시에 파멸의 장치다. 남자들은 토미에를 욕망하다 무너지고, 토미에는 죽어도 다시 증식한다. 미와 혐오, 에로스와 살의가 한 인물 안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나중에 소용돌이가 개념을, 공포의 물고기가 불쾌를 밀어붙였다면, 토미에는 이토 준지가 왜 인간의 욕망 자체를 호러의 재료로 다루는 작가인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2. 형태 하나로 마을 전체를 무너뜨린 〈소용돌이〉
이토 준지의 대표작 〈소용돌이〉다. / 출처: 시공사
이토 준지의 대표작을 한 권만 꼽으라면 소용돌이이다. 이토 준지가 1998년부터 빅 코믹 스피리츠에서 연재한 소용돌이는 쿠로우즈초라는 해안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사람이나 귀신이 아니라 패턴, 즉 소용돌이에 저주받았다는 설정이다. 4부작 애니메이션 시리즈로도 나온 바 있다. 소용돌이의 진짜 무서움은 소용돌이라는 너무 단순한 형상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는 데 있다. 머리카락, 달팽이, 하늘, 계단, 사람의 몸까지 전부 한 패턴으로 빨려 들어간다. 보통의 호러가 괴물을 세우는 방식이라면, 이 작품은 개념 하나로 세계를 오염시킨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읽다 보면 특정 장면보다 원리가 무섭다. 일상 어디에나 있는 모양 하나가 어느 순간부터 재난이 된다. 이토 준지의 상상력이 얼마나 구조적이고 집요한지 확인하려면 결국 소용돌이를 지나야 한다.
3. 바디 호러의 정수 〈공포의 물고기〉
〈공포의 물고기〉는 바디호러의 시초 격이다. / 출처: 시공사
세 번째는 공포의 물고기다. 죽음의 냄새가 섬 위를 떠다니고, 다리가 달린 기괴한 물고기가 나타나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바다에서 밀려온 이상한 생물과 정체불명의 악취가 인간 세계를 잠식하는 설정이다. 소용돌이가 형상의 공포라면, 공포의 물고기는 촉감과 냄새의 공포에 가깝다. 공포의 물고기는 이토 준지가 시각적인 기괴함만 잘 그리는 작가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한다. 독자는 종이 위의 그림을 보는데, 이상하게 코를 막고 싶어진다. 썩는 냄새, 축축한 점액, 삐걱거리는 움직임이 페이지 밖으로 밀려 나온다. 바디 호러와 재난물, 풍자와 그로테스크가 한꺼번에 섞여 있는데도 끝까지 무너지지 않는다. 이토 준지의 작품 중 읽을 수록 기분이 나빠지는 책을 고르라면 아마 가장 앞줄에 설 것이다. 그것이 공포의 물고기의 미덕이다.
4. 단편으로 만나는 정밀한 세계 〈이토 준지 자선 걸작집(Shiver)〉
이토 준지의 진짜 매력은 단편에 있다. / 출처: 시공사
이토 준지를 장편만으로 읽으면 반쪽이다. 그의 진짜 무기는 짧게 치고 빠지는 단편에 있다. 이토 준지 자선 걸작집은 작가가 직접 고른 9편의 단편과 창작 비화, 당시 아이디어 노트와 러프를 함께 담은 책이다. ‘목매는 기구’, ‘패션 모델’, ‘긴 꿈’ 같은 대표 단편이 들어 있다. 이토 준지가 왜 한 장면의 천재도 불리는지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토미에와 소용돌이가 긴 호흡으로 세계를 쌓아 올린다면, 단편집은 몇 페이지 안에 불길한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속도를 보여준다. 특히 ‘목매는 기구’ 같은 작품은 설정 한 줄만으로도 바로 기억에 박힌다. 장편으로 입문한 뒤 결국 단편으로 돌아오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토 준지의 상상력은 길어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짧아도 끔찍하게 정확해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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