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코리아=조성란 기자] “투항하면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믿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들에게 남은 것은 기약 없는 기다림과 침묵, 그리고 거리 시위뿐이었다.
제27회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 단체로 선정된 스리랑카 강제실종자가족협회(ARED)의 릴라데비 아난다나다라야 사무총장이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식당 ‘마지’에서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ARED(The Association for the Relatives of the Enforced Disappearances)는 단순한 인권단체가 아니라, 스리랑카 내전(1983~2009) 당시 국가 폭력에 의해 사라진 가족의 행방을 묻기 위해, 삶의 한복판에서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다.
2017년 2월 20일 실종자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들은 스리랑카 북부 키리토치(Kilinochchi)를 비롯해 바부니아, 트리코말리 등지에서 3,250일이 넘는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속적인 거리 시위를 이어오고 있다. 이들은 실종자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강제 실종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목표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아직도 기약없이 '진실만 알려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날 인터뷰에서는 ARED를 대표해 릴라데비 아난다나다라야(Leeladevi Anandanadarajah) 사무총장과 사로야 칸타사미(Saroja Kanthasamy) 활동가가 직접 참석해 스리랑카 현지의 인권 상황과 투쟁의 기록을 전했다. 두 사람 모두 강제 실종 피해 가족으로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테러리스트 아닌 인권과 평등을 위해 싸운 평범한 시민이었다
이 긴 싸움의 출발점에는 스리랑카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싱할라족 중심 권력의 타밀족 차별이 있다. 타밀족은 오랜 시간 정치·사회적으로 배제와 억압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저항과 충돌이 격화됐다.
아난다나다라야 사무총장과 사로야 칸타사미는 이날 인터뷰에서, "실종자들은 테러리스트로 규정해선 안된다"고 호소했다.
정부가 그렇게 낙인찍었을 뿐, 실제로는 차별과 폭력 속에서 존엄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던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설명이다.
"차별이 누적된 끝에 폭력이 구조화됐고, 그 차별에 항거, 평등과 최소한의 인권을 위해 나선 평범한 시민들이었고, 그 결과 수많은 평범한 시민이 희생됐다"는 것이다.
가족을 잃은 어머니들 역시 자신들의 아들, 딸이 국가가 말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억압 속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시민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정부 믿고 자식 넘겼지만, 2만여명 생사도 알 수 없이 사라졌다
릴라데비 아난다나다라야 사무총장은 간담회에서 자신의 경험을 꺼냈다.
내전 말기 정부는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면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많은 가족들이 그 말을 믿었다. 일부는 스스로 당국에 투항했고, 또 어떤 가족들은 자녀를 직접 정부 측에 넘겼다.
릴라데비 사무총장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부의 말을 믿고 아들을 넘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항복하거나 인계된 사람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생사도, 수감 여부도,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가족들에 따르면 당시 당국에 넘겨진 인원은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요구에 돌아온 건 침묵뿐, 절규
그때부터 가족들은 국가에 최소한의 답을 요구했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어디에 있는지만이라도 알려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설명이 아니라 침묵이었다. 약속했던 명단 공개도 이행되지 않았고, 면담 자리에서조차 진지한 태도를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이들은 증언했다. 결국 어머니들은 정부 청사도, 법정도 아닌 거리에서 진실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ARED의 시위가 뭉클한 이유는, 그것이 거대한 정치 구호보다 사적인 상실에서 출발한 절박한 외침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아들을, 누군가는 딸을, 누군가는 가족 전체의 삶을 잃었다. 나이가 들어가고 병이 깊어지는 와중에도 이들이 시위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부모들의 나이가 70대를 넘어선 상태로, 자녀의 마지막 행방조차 모른 채 삶을 마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위에 참여해 온 어머니들 가운데는 가족을 찾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다.
국제사회에 호소 중이지만 아직 진전 없어
이들의 활동은 거리 시위에만 머물지 않았다. 스리랑카 정부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국제사회에 직접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ARED는 2018년부터 유엔 인권이사회가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를 수차례 찾아 실종자 문제를 알렸다. 직접 제네바를 방문한 횟수도 15차례에 이른다. 그러나 이 같은 호소에도 불구하고 실종자들의 행방을 밝히는 실질적인 진전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현지에서 이어지는 시위 과정에서도 탄압은 계속됐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가족들의 시위에 대해 스리랑카 당국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시위를 막기 위해 법원의 '시위 금지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또 시위대가 당시 대통령이던 마힌다 라자팍사에게 접근하려 하자 경찰이 이를 가로막으며, 일부 어머니들이 발로 차는 등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고 ARED측은 전했다.
그래서 이들의 싸움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는 현재다. 내전이 끝난 지 오래지만, 가족들에게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지학순정의평화상은 오랜 저항을 국제사회에 인정받은 것, 버틸 새 힘이 된다
이번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은 그래서 단순한 ‘수상 소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릴라데비 아난다나다라야 사무총장은 이번 수상이 국제사회가 자신들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ARED에게 이 상은 오랜 침묵 속에서도 세계 어딘가에서 자신들의 오랜 투쟁을 보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상은 마치 새로운 피를, 에너지를 수혈받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적어도 우리의 싸움이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정의를 향한 싸움이 헛되지 않다는 확인이 앞으로도 진실과 정의를 향한 투쟁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실종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국제사회의 개입이 필요하다고도 호소했다. “국제형사재판소(ICC)나 국제사법재판소(ICJ) 등 국제기구가 나서 진상 조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지학순정의평화상은 인권과 정의의 현장에서 헌신해 온 이들을 기리는 상이다.
올해는 19개의 후보 단체 중 전문가 심사를 거쳐 최종 3개 후보가 압축됐다. 이후 290명의 시민시상단이 참여한 2차 평가를 통해 ARED가 최종 수상자로 확정됐다.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은 "ARED가 보여준 오랜 평화시위와 진상규명 요구가 인간의 존엄과 정의를 향한 실천이라고 평가했다"며 "총을 든 투쟁이 아니라, 사진을 들고 거리에 앉아 진실을 요구하는 싸움을 세계가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특히 올해는 제26회 수상자인 '뉴스타파'의 제안으로 신설된 '제1회 지학순정의평화다큐멘터리상' 시상도 함께 진행됐다. 뉴스타파가 받은 지난 상금을 기반으로 제정된 이 상의 첫 번째 주인공으로는 작품 ‘1980 사북’과 김태일 감독이 선정되어 그 의미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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