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최진승 기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나의 소원> 中) 나의>
서울 효창공원에 자리한 백범김구기념관은 100년 전 김구 선생이 꿈꿨던 '문화 강국'의 청사진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김구 선생은 우리나라가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자 모범이 되기를 바랐다. 우리나라로 인해 세계 평화가 실현되기를 원했다. 오늘 우리는 김구 선생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은 문화 국가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는 듯 하다. 이 같은 김구 선생의 선견지명을 되짚어볼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백범김구기념관이다.
◇ '마음의 길'에서 시작된 독립운동의 길
기념관의 시작은 황해도 텃골의 평범한 아이 '창암'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신분 차별의 벽을 넘고자 공부에 매진했던 청년 창암은 부패로 얼룩진 과거 시험장에게 절망을 느낀다.
과거시험을 접고 관상학을 공부하던 그는 자신의 얼굴에 귀하고 좋은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의상서'에 있는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구절에서 외면의 관상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세웠다. 이는 훗날 동학의 팔봉접주로서 평등 세상을 꿈꾸고, 치하포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으며 구국의 길로 들어서는 시작점이 됐다.
창암은 동학에 입문하면서 '창수'로 이름을 바꿨다가 치하포의거 후 인천감리서를 나오면서 '원종', '김두래' 등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25세(1900년) 때 동지들의 제안으로 이름을 '구(龜)'(거북 구)로 바꾸게 된다. 경술국치 후 독립에 대한 결의와 일제의 호적에서 이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시 '구(九)'(아홉 구)로 바꿨다. 김구의 호 백범(白凡)은 백정과 범부도 애국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김구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할 뜻을 세운다.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의 일을 계획하고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은해 4월 11일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그는 내무위원에 선출된다. 27년간 항일독립 투쟁의 구심점이 된 임시정부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서 교민과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내부총장, 국무령 등을 거치며 상해 시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자 임시정부는 의열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김구 선생은 단장으로서 이봉창, 윤봉길, 이덕주, 유진만, 최홍식, 유상근 등의 단원들과 함께 작전을 실행하게 된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진두지휘하며 침체된 독립운동에 불을 지피고, 8년간 대륙을 횡단하는 고난의 피난길 속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기록들은 보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이 시기 독립운동단체 내부의 분열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김구 선생은 총탄에 저격을 당하기도 했다.
김구 선생은 1940년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안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고, 밖으로 외교 정책을 펼치는 한편,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독립전쟁과 더불어 광복 이후 계획까지 세워나갔다.
◇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높은 문화의 힘이다"
"우리가 주연 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우리 민족이 옛날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 <나의 소원> 中) 나의>
김구 선생은 해방 정국의 혼란 속에서도 경제력이나 군사력보다 '문화의 힘'을 역설했다. 'K-컬처'가 전 세계를 매료시키고 있는 오늘날 김구 선생의 '소원'은 놀라운 선견지명으로 다가온다. 그가 꿈꾼 나라는 남을 침략하는 강대국이 아니라 인류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을 주는 '문화의 발원지'였다.
기념실 한켠에 자리한 유묵 '대인춘풍 지기추상(對人春風 持己秋霜)'은 선생의 인품을 대변한다.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임했던 그의 철학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김구 선생의 가족사는 그의 철학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보여준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을 때 "독립운동가는 배가 고파도 당당해야 한다"며 엄격한 기개를 가르쳤다.
임시정부 시절, 아들 김구 주석의 생일잔치 비용을 아껴 독립군을 위한 권총을 샀던 여사의 일화는 자식에게 사사로운 정보다 국가의 대의가 우선임을 몸소 가르친 교육이었다. 이 같은 가정교육은 백범이 평생 '지기추상(持己秋霜)'의 자세를 견지하게 한 힘이 됐다.
일제강점기 전후 김구 선생은 황해도 지역에서 보강학교와 양산학교를 세워 청년들에게 민족 의식을 고취했다. 그에게 학교는 지식 전달의 장이 아니라 나라를 되찾을 '인재의 산실'이었다. 안악사건으로 투옥된 와중에도 감옥을 '대학'이라 부르며 동지들을 가르쳤던 선생의 모습은 교육이 곧 독립운동의 또 다른 이름이었음을 보여준다.
상해에서 충칭으로 이어지는 임시정부의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선생은 교과서 편찬 사업에 매진했다. 임시정부 학무부를 통해 <초등국어> , <국사> 등을 발행한 것은 독립 후 세워질 새 나라의 시민들이 우리 말과 역사를 잊지 않도록 하려는 장기적인 안목의 결과였다. 국사> 초등국어>
그에게 교육은 '문화의 힘'을 실현하기 위한 미래 설계의 핵심이었다. 그는 온 국민이 성인(聖人)이 되고자 노력하는 교육된 민족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문화 강국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 온 것이다."
전시실 한켠에는 백범일지의 한 구절이 회초리처럼 보는 이를 때린다. 선생의 육신은 떠났으나 그가 남긴 정신은 오롯하다. 기념관을 나서며 마주한 봄바람은 김구 선생이 끝내 보지 못한 '완전한 통일'에 대한 숙제를 우리에게 던지는 듯하다. 하지만 그가 뿌린 문화 국가의 씨앗은 이미 전 세계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백범의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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