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주말 저녁.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늦게 식당에 도착했다. 급한 업무 전화 탓에 발을 동동 구르며 뛰어갔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숨을 헐떡이며 들어서자 그가 빈 물잔만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보고 있다.
미안하다며 서둘러 맞은편에 앉는데,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다. 불같이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게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배신을 당한 사람처럼 어깨가 처져 있다.
- - “나는 널 기다리는 동안 온갖 생각이 다 들었어. 내가 너한테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싶어서 비참하더라.”
십 분 늦은 행동을 단숨에 애정의 척도로 둔갑시키는 서늘한 윽박지름이다. ‘네가 늦은 행동으로 내 여린 마음에 지독한 상처를 줬으니, 당장 납작 엎드려 죄를 빌라’는 뜻이다.
숨이 턱 막힌다. 고작 십 분 늦은 잘못이 순식간에 사랑을 기만하고 상대를 비참하게 만든 대역죄가 된다. 어쩔 줄 몰라하며 그의 소맷자락을 잡고 변명조차 삼킨 채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한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른 채 내내 그의 눈치만 살핀다. 어느새 당신은 끔찍한 가해자의 자리에 앉아 있다.
서운함으로 둔갑한 정서적 통제
내현성 나르시시스트는 갈등이 생겼을 때 분노를 터뜨리지 않는다. 대신 ‘서운함’이라는 아주 교묘하고 무거운 도구를 꺼내 든다. 건강한 관계라면 서로 서운한 점을 말하고 조율하며 오해를 푼다. 이들에게 서운함은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일방적인 족쇄다.
정작 본인이 약속에 늦었을 때는 반응이 완전히 다르다. 차가 막혔다거나 일이 늦게 끝났다는 핑계를 대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당신이 섭섭한 기색이라도 보이면 그는 몹시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쉰다.
- - “너는 왜 사소한 걸로 사람을 달달 볶아? 내가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니잖아.”
철저한 내로남불의 선언이다. ‘내 실수는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이지만, 네 실수는 나를 향한 애정 부족과 인성 탓이니 따지지 말라’는 강요다.
억울한 마음에 논리적으로 상황을 따져 물으면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처연한 눈빛을 보낸다. 내가 말이 좀 심했나. 이 사람 참 여린 사람인데 내가 또 상처를 헤집었구나.
죄책감이 밀려온다. 분명 시작은 그의 무례한 행동이나 사소한 실수 때문이었는데, 대화의 끝에는 항상 당신이 무릎을 꿇고 사과를 바치고 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당신 스스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기울어진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책임
이들과의 연애는 바닥이 한쪽으로 깊게 기울어진 방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 당신이 아무리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서려 애써도, 모든 갈등과 문제의 원인은 결국 낮은 쪽인 당신의 발밑으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진다.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법이 없다. 상황을 교묘하게 비틀어 당신의 평소 태도나 과거의 실수를 끌고 온다. 어제 내가 피곤하다고 짜증 낸 것 때문에 오늘 그가 중요한 일정을 망친 게 된다.
평소에 살갑게 연락을 자주 안 해서 그가 홧김에 다른 사람과 술을 마신 게 된다. 모든 기승전결의 끝에는 당신의 부족함이 자리 잡고 있다.
억지라는 걸 머리로는 안다. 그의 그 우울하고 확신에 찬 태도 앞에서 자꾸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내가 진짜 원인 제공을 한 걸까. 내 성격이 문제라서 이 사람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기울어진 바닥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매일매일 내 행동을 검열하고 혹시라도 그를 거슬리게 할까 봐 전진을 멈춘 채 전전긍긍한다.
숨 쉬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목을 조른다.
고상한 피해자가 되려는 이기심
그가 원하는 건 문제의 해결이나 건강한 화해가 아니다. 자신은 흠결 없는 순수한 피해자여야 한다는 강박을 채우는 게 유일한 목적이다. 무조건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의 위치를 선점해야 마음이 놓인다. 당신은 그저 그의 억울함을 돋보이게 만들어 줄 만만한 배경일 뿐이다.
- - “더 이상 말하지 마. 들을수록 내 비참함만 커지니까.”
입을 틀어막는 거다. 네가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면 내 고상한 피해자 위치가 흔들리니, 당장 입을 다물고 나쁜 사람의 역할을 수용하라는 뜻이다.
그는 당신이 눈물 흘리며 사과할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그들은 타인을 죄인으로 만들어 짓누를 때만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알량한 권력욕을 충족한다.
쩔쩔맬수록 그의 내면은 거대한 우월감으로 팽창한다. 당신의 자존감을 깎아내어 자신의 텅 빈 속을 채우는 지독한 이기심이다. 곁에 있는 사람의 피를 말려가면서 자신의 고결함을 유지하려 든다.
억지 사과를 멈추고 똑바로 설 때
당신은 죄인이 아니다. 그토록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관계를 망치는 미숙한 사람이 결코 아니다. 단지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판을 짜는 사람의 덫에 걸렸을 뿐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연애는 비정상이다. 아무리 잘하려고 노력해도 내 탓으로 끝나는 관계라면 애초에 정답이 없는 거다. 백 점을 맞아도 그가 매번 자기 기분대로 채점 기준을 바꿔버리니 도리가 없다.
기울어진 방에서 발버둥 치며 억지 사과를 쥐어짤 이유가 없다. 억울함을 풀겠다고 매달려봤자 그는 교묘한 한숨과 차가운 눈빛으로 당신을 후려칠 거다.
처연한 표정으로 탓을 돌릴 때 같이 슬퍼하거나 자책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잘못한 게 없다고 단호하게 시선을 맞받아치는 게 낫다.
억지로 씌워진 죄인의 굴레를 조용히 벗어 던지면 된다. 평생 남 탓만 하며 살아갈 그 콧대 높은 피해자를 기울어진 바닥에 혼자 남겨두고 문을 열고 나오면 그만이다. 평평하고 단단한 땅을 딛고 서서 당신의 맑은 숨을 크게 쉬어야 할 시간이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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