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적한 동호회 모임. 다들 언성을 높이며 웃고 떠드는데, 그는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아 남들의 빈 잔에 물을 채워주거나 테이블을 닦고 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입을 모아 당신을 부러워한다.
남자친구가 참 순하고 착하다며, 요즘 저런 사람 없다고 치켜세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조수석에 앉은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 - “나는 남들 앞에 나서는 건 질색이야. 그냥 뒤에서 조용히 챙겨주는 게 맘 편해. 넌 저렇게 기 센 사람들 틈에서 피곤하지도 않아?”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하다. 가슴이 따뜻해진다. 세상의 모진 풍파에 물들지 않은, 무해하고 선량한 사람. 얕고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홀로 고요함을 간직한 사람. 내가 이 조용하고 착한 사람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무해함으로 포장된 지독한 책임 회피
내현성 나르시시스트가 뒤로 물러나 있는 건 배려심이 깊어서가 아니다. 관계에서 마찰을 빚고 책임을 져야 하는 진흙탕에 발을 담그기 싫은 거다.
갈등 상황이 생기면 언제든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며 쏙 빠져나가기 위해 조용한 관찰자 자리를 고집한다. 겉보기엔 양보를 잘하는 천사 같지만, 그 속에는 자기 손에 흙을 묻히지 않겠다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
- -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난 진짜 다 괜찮아.”
메뉴를 고를 때나 주말 데이트 장소를 정할 때 어김없이 나오는 대답이다. 상대를 온전히 존중하는 넓은 마음처럼 들린다. 속내는 전혀 다르다.
‘선택에 따른 귀찮은 수고와 책임은 네가 다 짊어져라. 만약 결과가 마음에 안 들면 그 원망도 네가 다 받아내라’는 얌체 같은 떠넘기기다.
당신은 그를 기쁘게 해주려 유명한 맛집을 검색하고 복잡한 동선을 짠다. 막상 도착한 식당에 웨이팅이 길거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분위기가 묘하게 싸늘해진다.
그는 대놓고 불평하지는 않지만 숟가락을 일찍 내려놓으며 미세하게 한숨을 내쉰다. 표정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른 채 눈치만 살핀다.
애초에 함께 결정했어야 할 일인데 어느새 당신 혼자 그를 만족시키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죄인이 되어 있다.
화내지 않는 폭력의 끈적함
착한 가면은 갈등이 터졌을 때 가장 섬뜩하게 빛을 발한다. 건강한 연인은 싸울 때 서로 목소리를 높이더라도 속내를 다 쏟아내며 문제를 풀어나간다.
그는 절대로 소리를 지르거나 험한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세상에서 가장 처연하고 불쌍한 표정으로 바닥을 응시할 뿐이다. 참다못해 당신의 언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슬픈 대사를 읊는다.
- - “내가 부족해서 그래. 널 화나게 해서 미안해. 그냥 다 내 잘못이야.”
싸움을 끝내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사과가 아니다. ‘나는 이렇게 한없이 낮아져서 져주는데, 네가 감히 계속 화를 내며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우느냐’는 교묘한 입막음이다.
억울해서 미칠 것 같다. 정작 상처받은 건 당신이고 원인을 제공한 건 그인데 상황은 기묘하게 뒤집힌다. 그는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완벽하고 고상한 피해자의 자리에 안착한다.
당신은 별것도 아닌 일에 핏대를 세우며 착하고 조용한 사람을 쥐잡듯 잡는 히스테릭한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혼자 씩씩대다가 결국 제풀에 지쳐 도리어 그에게 사과하는 촌극이 벌어진다.
미안해, 내가 말이 좀 심했어. 당신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는 그 착한 가면 뒤에서 당신이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여유롭게 감상하고 있다.
맑은 일상을 덮치는 축축한 습기
착하고 조용한 사람 곁에 있는데 이상하게 몸이 무겁다. 그의 침묵은 안도감을 주는 고요함이 아니라 숨을 멈추게 만드는 진공 상태에 가깝다. 무엇이 불만인지 속시원히 말해주지 않으니 온종일 그의 표정을 해독하느라 진을 뺀다.
연락이 조금만 뜸해도, 대답이 조금만 짧아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또 뭘 실수했나. 이 여린 사람을 내가 또 서운하게 만들었나. 스스로를 검열하며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당신을 더 깊은 고립으로 몰아넣는다. 친구들은 네 남자친구 진짜 진국이라며, 요즘 그렇게 순하고 착한 사람 없다고 입을 모아 칭찬한다.
그 사람 곁에서 당신이 얼마나 피가 마르고 속이 타들어 가는지 털어놓을 곳이 없다. 답답함을 토로해봤자 배부른 소리 한다는 핀잔만 돌아온다. 당신 혼자 예민하고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이들의 침묵과 수동공격은 끈적하고 습한 곰팡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피어나 당신의 밝고 쾌적했던 일상을 눅눅하게 덮어버린다. 숨통을 틔우려고 아무리 창문을 열고 햇빛을 끌어들여도 소용없다.
그는 그 축축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당신이 건네는 모든 에너지를 묵묵히 빨아들인다. 겉으로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당신의 속은 이미 새까맣게 타들어가 재만 남았다. 혼자 서 있을 힘조차 잃어버리고 온전히 그에게 휘둘리는 무기력증에 빠진다.
가면을 찢고 방문을 나설 때
착하고 조용한 성격이 곧 선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화를 내고 욕을 하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다. 침묵으로 상대를 피 말리게 하고, 은근한 한숨으로 죄책감을 심어주며 끝내 상대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태도야말로 가장 음침하고 파괴적인 폭력이다.
그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상대를 말려 죽이는 사람일 뿐이다.
그 견고한 가면을 벗겨내려 헛된 에너지를 쏟을 필요 없다. 어떻게든 대화로 풀어보려 매달려봤자 튕겨 나오는 건 더 깊은 침묵과 원망 섞인 한숨뿐이다.
그 가면 뒤에 숨겨진 앙상하고 이기적인 민낯을 굳이 확인해봤자 비참해지는 건 당신의 지난 시간들이다.
남들이 그를 천사라 부르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치켜세우든 신경 쓸 것 없다. 그 평온한 얼굴 뒤에서 숨이 막혀 죽어가는 건 오직 당신이다. 무해하다는 지독한 착각에서 벗어나는 게 낫다.
그가 만들어놓은 그 눅눅하고 숨 막히는 방에서 조용히 짐을 챙겨 문을 닫고 나오면 그만이다. 당신의 맑고 건조한 일상을 되찾을 열쇠는 그가 아니라 당신 손에 들려 있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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